환대 이웃 관계
자두가 집에 온 지 20일이 되지 않은 요즘, 자두는 나의 반을 차지한다. 창문 넘어를 보고 있으면, 산 이 쪽 저 쪽에서 움직이는 고양이가, 길을 걷다가도 여기에 고양이가 저기에도 고양이가 그렇다. 며칠 전에는 바람에 날리는 검정 봉지를 검정고양이로 착각했다.
일동과 부곡동의 경계쯤에 고양이 집이 있다. 정원이 있는 3층 집이다. 정원과 복도에 숨숨집과 고양이 사료 통이 가득하다. 정원과 집 현관과 복도에 고양이가 꾸벅꾸벅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보인다. 집 안에도 고양이 두 어 마리가 왔다 갔다 한다.
그제 출근길에 그 집 앞에서 고양이를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하염없이'가 맞다. 우리 자두는 언제 저렇게 내가 쳐다보건 말건 신경을 쓰지 않을까, 만지는 건 기대도 안 한다고, 널 보는 것만이라도 편안하게 할 수는 없을까 그런 하염없는 마음으로 하염없이 고양이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캣맘인 집주인 할머랑 말을 섞게 되었다.
할머니 : 왜 무슨 볼 일 있으세요? (긴장이 팽배한 얼굴 근육과 목소리 톤이셨다.)
나 : 아, 고양이 좀 볼 수 있을까요? (자두 대할 때처럼 긴장 가득)
할머니 : 고양이 좋아하세요? (캣맘 할머니는 고양이랑 비슷하신 거지? 왜?)
나 : 이 주 전부터 고양이랑 같이 살아요.(여전히 쑥스러움. 야단맞을 것 같은 이 느낌은 무엇)
할머니 : 새끼 고양이요?(조금은 누그러워지셨지만 여전히 무서운 얼굴)
나 : 아니에요. 성묘인데.... 어쩌고 저쩌고 어쩌고 저쩌고(할머니가 무섭든 말든 계속 이야기함. 고양이 집사 방언 수준이었음)
할머니와 나는 잠깐 오래 이야기했다. 나는 출근 중이었고, 할머니도 출근 준비를 해야 하는데, 수다를 떨었다. 할머니는 나한테 고양이 한 마리를 더 입양할 생각이 없냐고 하셨다. 저기 산 밑에 영역을 못 찾아서 매일 불쌍하게 다른 고양이에게 구박을 맞는 고양이가 있다고 하셨다. 할머니와 나는 서로 무슨 일을 하는지까지 이야기했다. 내가 센터 교사라고 하자, 할머니가 자신은 센터 옆 하늘 어린이집에서 노인 일자리로 이야기 할머니 일을 한다고 알려주셨다. 할머니가 다음에 시간 있을 때 더 많이 이야기하자고 하셨다.
자두를 데려오기 하루 전, 부산에서 집까지 열차 안에서 혼자 잠을 자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꼭 정면을 바라보는 게 관계인가, 나는 이제 그 정면 바라보는 관계를 확장시키는 게 힘에 부치는 데 그러다 혼자 결론을 내렸다. 측면을 바라보는 건 안되나, 측면을 바라보는 관계가 어쩌고 그 관계를 연결하는 게 어쩌고 공상 아닌 공상을 하다 깜빡 잠이 들었다.
자두는, 자두는 정면의 관계를 질색한다. 아예 안 보이는 걸 제일 좋아하는 것 같고, 다음은 등 뒤고, 그다음은 옆 모습니다. 자는 내 옆에서 가만히 나를 보기도 하고, 책상 앞에 있는 나를 옆에서 몇 번을 본다. 모두 내가 움직이나 안 움직이나 안정감을 체크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가끔은 나라는 거대 고양이를 관찰하는 것도 같다.
평행이론이 적용했다. 나도 자두도 둘 다 측면의 관계를 좋아한다. 자두야, 너랑 나랑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어쩌고 저쩌고 외치고 싶다.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자두를 환대하는 거지만, 뭐 환대에서 누가 먼저 시작하고 누가 반응을 하는지 뭐가 그리 중요하랴, 나는 너의 화장실을 치우고, 너의 밥과 간식을 챙기고, 너를 위한 음악(고양이를 위한 음악이라는 게 존재한다.)을 틀고, 너를 위해 집 안 오도를 조절한다. 그 환대의 행위 만으로 나는 재미있고 즐겁다. 정면이 아닌 측면의 관계 괜찮다.
자두 덕분인지, 열차 안 오수 전 공상 때문인지, 동네 기록에 관한 여러 생각 덕분인지, 나는 캣맘 할머니와 수다를 떨, 서로의 신상까지 공개했다. 어쩌면 이웃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이웃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정답은 모르겠다. 그냥 나한테는 이웃이다.
정면이 아닌 측면의 이웃
할머니는 고양이와 같이 사는 마녀 같은 분위기를 지니셨다. 나도 뭐 그리 첫인상이 편한 사람도 아니고, 아이들한테는 깔깔 마녀다. 언젠가 이런 이야기도 해야지. 뭐, 이야기 꼭 안 해도 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