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하고 자연적인 감정?

왜 즐거우면 안 돼?

by 열무샘

과거의 사건을 잘 못 이해하고 해석한 게 아닐까? 그리고 그 잘못됨으로 틀린 방법을 쓴 게 아닐까? 아이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으로서 나는 잘 못 된 이해와 방법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결정적 실수가 아님에도(방과후 어른이 결정적 실수를 할 수 있을까? 만약 결정적 실수를 했다면 그 실수가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아이와 관계를 주목해야 한다. 아이의 삶에 결정적인 실수를 할 만큼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정도의 가까운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 자체가 틀렸다. 아이는 아이고, 어른은 어른. 게다가 방과후 어른은 친족도 아닌, 그냥 어른일 뿐이다) 교사 혹은 돌봄 종사자의 역할을 하는 어른이기에, 영향과 파장을 점검하고 성찰해야 한다.


작년 6월 나는 몇 명의 아이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했고, 권위를 행사했다. 아이들의 혐오와 폭력 행사가 원인이었다. 놀이로 재미있으려고 웃으면서 욕하고 치고 던지는 행위, 다른 맥락과 상황 상관없이 혐오와 폭력 현상은 그 자체로 심각하게 느껴졌고, 교사회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강력한 경고를 한 덕분에, 번잡스럽고 짜증스러운 상황도 연출되었다.(올해 7월 그러니까 만 일 년이 지난 후에, 그 당시 나에게 혼이 났던 아이의 부모와 면담 자리에서 “제가 깔마 욕을 했어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예상은 했지만, 지겨웠다. 혼이 났던 아이들과는 탈 없이 지낸다. 그 아이들은 6월 이후에도 나에게 크게 혼이 났고, 혼이 난만큼 거리가 가까워지기도 했다. 결론 적으로 이 사건 덕분에 다른 교사, 학부모와는 불편했지만, 아이들과 관계에서는 특별한 문제가 없는 것으로, 역시 나는 아이가 훨씬 편한 사람으로 증명된 셈이다.)

6월의 이해와 방법이 정확하고 적절하냐는 또 다른 차원이다. 다른 교사들은 모르겠는데, 나는 분명히 문제의 핵심을 잘 못 읽었고, 그래서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왜 즐거우면 안 돼?”

“너희의 즐거움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니까.”

“무슨 영향을?”

“시끄럽고 같이 흥분하니까, 누군가는 불편하니까. 영향뿐 아니야. 너희들은 이제 주위와 다른 사람을 의식해야 하는 나이잖아.”

“왜 우리만 그래야 해? 걔네들도 우리 의식 안 하잖아.”


너무나 즐겁게 웃으면서, 너무나 즐겁게 소리를 지르면서, 너무나 즐겁게 팔다리를 흔들면서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아이들 옆에는 누군가가 귀를 막고 책을 읽고 있었다. 고백건대,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아이들을 중지시키고 “우리 이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 좀 해보자”라고 제안하는 데도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대화 도중 아이들은 이렇게 물었다. “왜 즐거우면 안 돼?” “왜 우리만 그래야 해?”


난감했다. 소리를 지르고 웃고 떠들고 격하게 행동하는 아이들은 많다. 하지만 이렇게 집요하게 혹은 순진하게 “왜?”라고 질문하는 아이를 맞닥뜨리는 건 낯설고 당혹스러웠다. 이 아이들은 소음 말고는 다른 피해를 주지 않았다. 폭력을 행사하거나, 혐오를 던지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 아이들의 연령을 고려한다면 내가 말하는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주위에서 ‘나’를 바라본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야 되는 게 아닐까, 뭐지, 내가 너무 엄격하나, 아니, 엄격을 떠나서 아이들이 말한 방과후에서는 모두가 다 그러하다는 인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자연스러운 것, 원래 그런 것으로?


작년 6월의 사건, 요즘도 간간히 보여지는 그때 그 아이들의 행동과 “왜?”라고 질문을 던지는 아이들의 행동은 과연 다른 걸까? 전자가 혐오와 폭력을 동반했고, 후자는 자기들끼리의 즐거운 놀이라는 점은 분명히 다르다. 하지만 두 그룹은 분명히 놀려고 즐거워지려고 재미있으려고 큰 소리로 웃거나 치고, 손발을 흔들거나 물건을 던졌다. 교사의 고함소리에도 끄덕 없을 정도로 과하게 혹은 자신만만하게. 작년의 나는 이 두 그룹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혹은 전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후자를 (잠재적) 피해자로 생각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니 전자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강한 경고와 권위를 행사하는 것으로 정할 수밖에 없었다. 후자의 아이들은 어떤 방법을 사용했지? 별 기억이 없다. 다만 어딘가 찝찝하고 불편한데 이건 뭐지 했던 것 같다.


괴롭다. 작년 6월의 나는 잘 못 이해하고 정확하지 않은 방법을 사용했다. 분명 어딘가 헛 다리를 집고 있다. 교사의 이해, 해석, 방법 모든 측면에서. “왜 즐거우면 안 돼?”라는 질문에 답을 찾지 않는 한 헛 다리는 계속될 것 같다.


18세기 감상주의는 감정을 ‘진정하고’ ‘자연적인’ 것으로 여긴다. 감정은 진정하고 자연적인 것이기에 모든 행위와 사건과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출발과 기준이 된다. 이 진정하고 자연적인 감정은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중요한 도구였다. 사람들은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으로 공동체를 결속시키고, 공동체의 힘을 강화시켰다. 감정을 인지하고, 표현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믿음은 역시 진정하고 자연적으로 여겨졌다.

18세기 감상주의가 어떻게 몰락했는지, 그리고 이 진정하고 자연적인 감정이 사실은 학습되고 계발되는 것이라는 걸, 현재의 우리는 안다. 하지만 18세기 혁명을 통과하던 프랑스는 달랐다. 그들은 믿고 또 믿었다. 감정은 진정하고 자연적이다고.

<감정의 항해>가 꼼꼼하게 기록하는 역사는 흥미롭고 재미있다. 격렬한 감정 언어로 구사된 정치 연설문을 읽고 있으면 웃음이 나오기까지 한다. 하지만. 나는 흥미롭고 재미있으나, 그 당시 당대 현장의 사람들에게 과잉 감정으로 얼룩진 역사는 어떠했을까? 공포와 처형과 혼란과 기아.


“왜 즐거우면 안 돼?”에 관한 답을 나는 가지고 있다. 시간이 꽤 걸릴 것 같다. 아니 시간이 걸려도 바뀌지 않을 수 있다. 괴롭겠지? 괴로워도 할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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