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리타> 이야기
40대의 리타는 아이가 셋이다. 막내가 9학년이니, 이제 다 키웠다고 할 수도 있다. 리타는 유능한 교사다. 유능한 교사에 관한 기준은 서로 다르겠지만, 내 기준으로는 능력 최고치다. 리타는 아이들 문제를 있는 그대로 인지하고, 함께 해결한다. 편견도 없고, 편애도 없다. 다만 낙오자를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 목표이므로, 문제가 있는 아이들에게 우선 다가간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다음에 물음표를 붙여야겠다. 리타를 소개하는 대부분 글은 이렇다. ‘교사로서 유능한 리타, 그런데 자기 문제는 엉망’. 드라마를 보기 전 의문이 들었다. 일을 대하는 태도와 자신과 타인을 대하는 태도는 거의 비슷하다. 일을 잘한다 못한다의 기준 역시 다양하겠지만, 내 기준으로는 비슷하다. 특히 교사, 복지사, 상담사, 조직 활동가 같은 사람을 대하는 직업인이 ‘교사로서는 유능한데, 자기 문제는 엉망’이라는 수식어를 다는 건 이상하다. ‘그런데’라는 접속사가 어떻게 가능하지 궁금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저 ‘그런데’라는 접속어, 자기 문제는 엉망이라는 문장이야말로 문제가 있다. 리타의 문제라고 열거되는 부분은 이렇다. 여러 명의 남자와 쉽게 섹스함, 섹스는 하고 연애는 안 함, 감정 표현이 적음, 자녀의 난독증을 알아차리지 못함, 막내의 성적 취향에 관해서 가볍게 이야기함, 어머니와 관계가 무척 나쁨 등등이다.
정말 리타의 문제라고 규정되는 것들이 문제일까?
어머니와 관계가 무척 나쁨? 누구나 자기 부모와 문제가 있지 않나? 리타의 어머니처럼 리타가 성장하는 동안 자기 아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에게 몰두한 부모가 있다면, 어머니를 싫어하는 건 자연스럽지 않을까? 그렇다면 리타의 어머니가 문제였을까? 드라마는 리타의 어머니가 그럴 수밖에 없다는 점을 그냥 그렇게 표현한다. “그때 나는 어쩔 수 없었어.”라고. 게다가 리타의 어머니는 리타의 딸, 그러니까 자신의 손녀와 관계를 맺으면서, 난독증을 앓는 손녀를 보듬어 안는다. 그러면 되는 게 아닐까? 리타와 리타의 엄마가 극적인 화해를 하고, 무난하게 잘 지내지 않는 게 뭐 그리 큰 문제일까? 시즌2에서 리타는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 후 어떤 변화를 겪는다. 자신은 어머니를 부정하면서, 사실은 어머니에 종속되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한다. 그리는 그녀는 내내 울지 못하고 있다가 울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딸의 난독증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엄마? 난독증은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증상이 아니다. 무엇을 난독증으로 규정하는지, 난독증 자체를 질병으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다. 딸이 리타에게 화를 낸다. 왜 나의 병을 몰랐냐고. 리타는 대답한다. 난 네가 난독증이 아니라고 생각해.
이 지점에서 또 원칙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 아이의 난독증을 발견하는 일이 부모, 그중에서도 특히 엄마의 몫인가? 딸의 공교육 기간 내내, 교사와 어른들 역시 난독증을 파악하고 진단하고 치료하지 않았다. 엄마인 리타에게 난독증 문제를 책임지라는 건 틀리고 나쁘다.
자녀의 성적 취향에 대해서 가볍게 이야기하는 엄마? 성적 취향이 뭐 대수라고. 리타가 말한다. “동성애는 부모가 그냥 그렇구나 하면 되는 거야.”라고. 이건 문제도 아니다.
다음은 여러 남자와 쉽게 섹스를 하지만 연애는 하지 않는 리타 이야기다. 이 문제는 좀 더 복잡하다. 아직 중반부에 이르지 않은 시즌 2 초반에, 리타는 ‘나도 연애를 할 거야.’라며 연인을 만든다. 긴밀하고 친밀한 연애는 리타에게 힘든 과제를 선사한다. 내 취향과 달라도 꾹 참기, 다른 멋진 남자가 등장해도 꾹 참기, 상대방이 사랑해라고 말하면 이 쪽도 사랑해라고 대답하기, 심지어 자신의 교육 가치관과 반대되는 연인의 교육적 결정을 따르기도 한다. 리타의 눈물겨운 노력을 보고 있으니 나야말로 눈물이 날 지경이다.
리타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섹스를 하고 싶으면 섹스를 하고, 또 만나자고 하는 남자에게 NO를 하고, 자기 취향을 존중하고, 자기 신념과 가치를 밀고 나가고, 사랑해라는 말은 하고 싶을 때, 신중하게 하는 그런 사람이다. 그야말로 ‘그런데’이다.
그런데 왜 리타는 노력을 해야 하는 걸까? 상대방을 배려하기 위해서? 배려는 자발적으로 진심으로 등장해야 하는 법. 무엇보다 배려는 각자 자기 자신만의 방식이 있는 게 아닐까?
섹스는 말해 무엇하랴. 왜 사람들은 남의 성생활에 이래저래 관심을 갖고 참견을 하는 걸까? 친밀한 관계라는 것도 마찬가지 리타는 자기 아이들과, 학교 아이들과, 정기적 섹스 파트너와 자기만의 방식으로 친밀하게 관계를 맺고 있다.
<감정의 항해> 239쪽에서 240쪽에는 프랑스 감상주의의 만개가 여성에게 어떤 미덕을 요구하는지 소설과 연극을 통해 알려준다. 이 시기를 전후로 해서 인간의 미덕에 관한 기준은 달라졌다. 감정을 자제하고 이성의 힘을 발휘하던 과거와 달리, 이 시기 미덕은 ‘감정’에 관한 내용이다. 열정, 배려, 따뜻함, 천진난만함. 거의 대부분 여성이 남성에게 선사할 수 있는 미덕이다. 많은 미덕을 주는 여성의 특징이 흥미롭다. 신분이 낮은 계층의 여성, 어린 여성, 무지한 여성. 도대체! 도대체 다음은 생략.
신분이 높고, 나이가 많고, 배운 여성은 미덕이 모자란다. 그녀들은 대체로 남성과 비슷하게도 이성의 힘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 무슨! 무슨 다음 역시 생략.
여성은 남성에게 감정을 제공해야 한다. 우리의 리타마저도 자신과 맞지 않는 감정 제공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마당이니, 평범한 보통의 한국 여성은 오죽할까 싶다.
드라마 리타가 어떻게 전개될지 잘은 모르겠다. 짐작컨대 그녀는 사랑해라고 이야기해주기를, 맞추고 배려해주기를 요구하는 애인과 헤어지지 싶다. 그리고 그녀 옆에는 섹스하고 싶은 남자가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으니까.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되지도 않는 미덕을 계발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리타를 보는 일은 괴롭다.
누구를 위한 감정, 누구를 위한 미덕이 아니라 제발 각자 자신을 위한 감정, 자신을 위한 미덕에 집중했으면 좋겠다. 아니 감정과 미덕이라는 말도 당분간은 쓰지 않는 게 좋겠다.
이 시점에서 다시 묻고 싶다. 감정은 무엇이고, 미덕은 무엇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