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출발점에 선 10년 차 디자이너의 이야기
나는 만들기를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내 걸로는 부족해서 동생들 재활용 만들기도 싹 모아서 해주고 친구들 그림 숙제도 대신해줬다.
무슨 기념일마다 그렇게 열심히 선물들을 만들어댔다. 매년 발렌타인 데이땐 주변 친구들 모두에게 줄 초콜릿을 만들고, 책 한 권을 선물할 때도 포장 상자를 직접 만들었다.
막연하게 그림 그리는 게 좋아 미술학원을 다녔고
막연하게 뭔가 만들어내는 걸 배울 것 같은 산업디자인과에 진학했다.
산업 디자인과에서는 제품 디자인, 가구 디자인, 공공 시설물 디자인 같은 것들을 배웠다.
과방 붙박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항상 학교에 살았고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하지만 졸업 후 나는 망망대해에 버려진 배가 된 것 같았다.
그때 내 인생은 돛도 없이 떠 있는, 방향 없는 배 같았다.
무작정 좋은 회사에 들어가야 할 것 같아 영어공부를 하고, 면접 스터디를 다녔다.
결과는 당연히 없었다. 열심히 했지만 ‘왜 해야 하는지’ 스스로 납득할만한 이유가 없었고,
당연히 그게 모두에게 보였을 것이다.
그때부터는 그냥 내 눈앞에 떨어진, 할 수 있는 일을 그저 열심히 했다.
취준 하면서 영어공부에 푹 빠졌던 덕분에(?) 영어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갑자기 경찰공무원을 많이 뽑는대서 시험 준비 한다고 형법 공부를 했다가,
갑자기 엄마가 도와달래서 철판 앞에서 막창을 굽고 식당을 운영했다.
(나름 줄 서는 맛집이 되었지만 정말 괴롭게 힘들었다.)
그러다 문득 이대로 흘러가면 안 된다는 생각에 서울로 올라왔고 아는 분께 소개받아 웹 디자인 일을 시작했다. 처음엔 돈이 없어서 왕복 4시간 출퇴근 길을 걸어서 다녔더랬다.
(그때는 운동된다며 열심히 걸었는데, 젊으니까 가능했던 것 같다.)
그렇게 시작한 웹 디자인 일은 강남의 어느 병원에서였다.
대학교 때 배운 것과 여기저기서 맡았던 로고, 명함, 전단지 경험이 있었지만 웹사이트 제작은 전혀 달랐다. 함께 협업한 개발자님이 꽤나 고생하셨을 것 같다..
그때 나는 경력이 없었지만 복잡한 이야기를 쉽게 풀어내는 과정에서 의미를 찾았고, 기획에 집중해 대표님의 신뢰를 얻었다. 그곳에서 웹사이트부터 상세페이지, 웹과 신문 광고, 브로슈어, 캐릭터, 심지어 인테리어 컨셉까지 필요한 온갖 것을 만들어냈다.
이후에는 점점 더 큰 조직을 경험하고 싶었고, 운 좋게 어느 대기업에서 파견직 디자이너로 일하게 되었다.
누군가는 파견직 디자이너가 물경력만 되고 아무런 쓸모없는 기회라고 했지만 나는 다 하기 나름이라 생각했다. 규모 있는 프로젝트에서 배우는 게 즐거웠고, 퇴근이 아까울 만큼 몰입했다. 안 따라가도 되는 회의에 부장님을 졸라 참석해 가며 소프트 스킬도 많이 배웠다.
즐거운 2년이었으나 그 이상은 회사가 나를 더 고용해 줄 수 없었다.
그렇게 퇴사 후 나는 제대로 UXUI 디자인을 배우고 싶었다.
기대를 안고 입사한 게임 회사는 예상보다 더 명확한 사업 아이템이 없었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프로젝트를 실행했기 때문에 많은 디자인을 시도해 볼 수 있었다.
흰 도화지에 그림 그리듯 그래픽을 만들어내는 디자인보다 명확한 구조를 설계하고 UX 관점에 따라 근거 있는 UI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재밌었다.
포토샵으로 UI를 만들어내던 환경에서 기나긴 설득 끝에 피그마를 정착시키고 팀원들의 성장을 돕기도 했다.
그렇게 조금씩 깊게 공부하다 보니 개발 공부에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갔다.
처음에는 디자이너 관점에서 HTML, CSS, Javascript를 배웠다.
Javascript로 다양한 기능을 추가해 미니 프로젝트들을 만들었고, 그러다 React와 Typescript까지 마구 배웠다. 공부할수록 코드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너무나 재밌게 느껴졌고 밑그림만 그리던 일에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동기를 얻었다. 기초 지식이 부족해서 정보처리 기사 자격증도 땄다. 나에게는 정말 어려운 공부였다.
[ 공부하는 동안 열심히 작성했던 개발 블로그 ]
그리고 야심 차게 커리어를 바꾸겠다고 선언했을 때 챗지피티는 본격적으로 이슈가 되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퇴사했지만, 애매한 실력으로 개발자 중고신입으로 취직해서는 답이 없음을 깨달았다.
또다시 방황이 시작되었다.
전에도 그랬지만 더더욱 강의 지옥에 빠져들었고 인풋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초조하고 불안해서 당장 작은 거라도 배우지 않으면 스스로가 한심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여러 가지를 배우면서 수많은 시도가 있긴 했지만 어느 하나 가속도를 붙이지 못하고 결국 멈췄다.
아마 그 프로젝트들에서 확실한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의미가 부족한 프로젝트들은 아주 작은 바람에도 쉽게 꺾였다.
공허한 시간들 속에서 우울이 나를 찾아왔고, 다시 루틴을 찾기 위해 디자인 프리랜서 일을 시작했다.
정기적으로 ‘해야만 하는’ 일이 필요했다.
돌아보면 참 잘한 선택이었다. 그 일 덕분에, 그 일을 함께하는 대표님들 덕분에 또 새로운 경험들이 생겼다.
웹사이트와 상세페이지를 만들며 AI를 활용해 다양한 컨텐츠를 만들어나갔고, 신뢰를 얻어 기획 업무도 맡게 되었다. 재택으로 하는 프리랜서 일이기 때문에 남는 시간에는 나의 일들을 할 수 있었다. 나는 계속 뭔지 모를 나만의 아이템을 찾아 헤매었고, 의미를 찾기 위해 애썼다.
그러다 연기우님의 강의를 만났고, 덕분에 그동안의 경험과 나를 돌아보며 진짜 의미 있는 일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 글은 그동안의 나의 모습을 돌아보기 위한 글이다.
앞으로는 어떤 문제점이 보이든, 누가 뭐라 하든 흔들리지 않고 쭉 밀어붙일 수 있는 코어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건 나를 제대로 돌아보았을 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나를 발견하고 브랜딩 하며 비즈니스맨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여기에 기록해보려고 한다.
이 글이 진짜 의미를 찾는 멋진 항해의 출발점이 되기를 바라며.
✦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 : 기획, 디자인, 개발
✦ 배워야 할 것 : 마케팅, 비즈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