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부터 재료를 모으기 위한 생각 정리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퇴사를 선택한 나는 많은 것들을 시도했다.
마케팅을 배우겠다며 작은 기업에 들어갔다가 내 가치관과 너무 다른 일과 사람들 사이에서 결국 도망치듯 나왔다. 프론트 웹 기술만 배우다가 만들고 싶은 앱이 있어서 Swift를 배워보기도 하고, 커서 AI를 활용해 풀스택 웹앱을 개발하는 강의를 듣기도 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디지털 상품을 기획하고 디자인해 시제품을 만들었고, 청년창업 지원금을 받겠다며 사업계획서를 쓰는 데 열정을 쏟기도 했다.
나는 원래 꾸준함이 강점인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최근에는 무언가를 시작해도 석 달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첫 번째 이유: 너무 많은 선택지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관심사도, 배울 수 있는 것도 넘쳐났다.
요즘처럼 지식과 도구가 넘쳐나는 시대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계속 늘어났다.
그 과정에서 기준도 없이 이리저리 휘둘렸고,
‘중요한 건 실행력’이라는 말에 사로잡혀 눈앞에 보이는 것을 닥치는 대로 실행했다.
두 번째 이유: 조급함
서른넷에 퇴사를 선택한 나는 2년간 방황했고 아직도 방황 중이다.
세상은 멀어지는데 나는 제자리에 머무는 것 같았다. 조급함이 나를 집어삼켰다.
끊임없이 빠른 길을 찾으며, 느린 과정 속의 나를 견디지 못했다.
세 번째 이유 : 흐릿한 기준
많이 배우고 실행했지만, 작은 벽을 만나면 쉽게 포기했다.
시제품을 만들다가 목적이 흐려지면 곧장 다른 아이디어로 옮겨가기를 반복했다.
어려움이 닥치면 내가 정말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의구심만 커졌다.
내 안에 분명한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지름길은 없다는 것을.
하루하루 묵묵히 걷다 보면, 어느새 성장한 나를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을.
넘쳐나는 선택지 속에서 빠른 결과를 원하는 조급함이 맞물려 악순환을 만들고 있었다.
단순한 기술이나 스킬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나만의 아이덴티티’가 필요했다.
그것이야말로 방향을 잃지 않게 해 줄 나침반이었다.
나는 너무 멀리, 수없이 반짝이는 별들을 무작정 쫓고 있었다.
이제는 꾸준하고 묵직하게, 포기하지 않고, 눈앞의 작은 계단부터 성실히 오를 때다.
겉으로는 하찮아 보이는 그 한 걸음이 결국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나를 발견하는 것에 힘써보고 있다.
나와 생각의 결이 같은 멘토들을 찾아 그들의 경로를 따라가 보는 중이다.
그 경로들에는 수많은 질문들이 있다. 나를 알기 위한 질문들이며,
내가 가진 것들로 사람들에게 어떤 가치를 제공할 수 있을지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 질문들 중 지금 답할 수 있는 것들을 정리해 본다.
Q. 내가 좋아하는 것, 나의 관심사는?
A. 커리어와 관련해서는 기본적으로 디자인하고 개발하는 것을 좋아한다. 어렵거나 정리되지 않은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다듬는 걸 잘하는 편이다.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 것도 많고 관심사도 참 많다. 주로 뭔가 하나하나 만드는 걸 좋아한다.
#키보드 : 커스텀 키보드 스위치와 키캡 수시로 교체하기. 스위치 하나하나 윤활하기.
#슬라임 : 슬라임이나 스퀴시, 피젯스피너 만지기. 한때는 슬라임 만드는 유튜브도 운영했다.
#뜨개질 : 뜨개질로 소품 만들기. 큰 것보다 작은 소품들 만드는 게 재미있다.
#정리정돈 : 인테리어, 살림과 청소. 깔끔하게 정리하고 각 잡는데 강박이 있다.
#인테리어 : 잘 꾸며진 인테리어나 소품 구경하기. 이케아와 모던하우스는 나에게 천국 같은 놀이동산이다.
#기계 : 새로운 기계 동향 파악. 특히 애플 생태계를 좋아한다.
#독서 : 원래 독서를 참 안 하는 인간이었는데, 최근 몇 년간 책으로부터 성장하고 위로받는다.
#러닝 : 무작정 뛰기 시작한 지 3개월 되었다. 이건 제발 좋아하게 되길 바라며 은근슬쩍 끼워 넣어본다.
#게임 : 주로 RPG 게임. 하나하나 퀘스트를 깨며 레벨 업하는 걸 좋아한다.
#명리학 : 사주에 관심이 많아 혼자 조금씩 공부했다. 이제 기본적인 건 볼 줄 아는 정도.
#개선하기 : 불편한 부분이 있으면 참지 않고 어떻게든 근본적 해결법을 찾아낸다.
#그 외 : 실용적인 것, 명확한 것, 깔끔한 것, 계획, 철학, 불교, 정신건강, 조용한 것, 설명하기, (아이는 없지만) 육아법, 요리, 먹는 것, 식물, 스킨케어, 글로벌, 언어, 프랑스.
재료가 되는 키워드를 모으기 위해 최대한 꺼내보았다.
Q.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했던 순간의 경험?
A. 가장 최근엔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몰입했고, 또 그전에는 기획한 디지털 상품을 디자인하면서 몰입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가장 행복한 순간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무언가에 빠져 있을 때다. 그동안의 몰입 경험들을 떠올려보니, 대부분 무언가를 하나씩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었다. 그게 무형의 것이든, 유형의 것이든 디테일을 다듬고 퀄리티를 높여가는 과정 자체가 즐겁다. 다만 진행하던 작업의 의미를 잃어버리거나 다음 단계가 보이지 않아 흐름이 끊기는 순간, 급격하게 무기력해진다. 최근에는 그런 시기가 오면 책을 읽는다. 당장 결과물을 만들지 못하더라도 성장에는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마음을 붙잡을 수 있다.
Q. 이건 진짜 나랑 잘 맞는다라고 느낀 순간?
A. 무언가를 구조화하고 정리하는 작업은 나와 확실히 잘 맞는다. 그래서 디자인과 코딩 모두 늘 재미있게 느껴진다. 디자인할 때는 계획한 레이아웃에 맞춰 UI를 만들고 시각화해 나가는 과정에서 재미를 느낀다. 그리고 그 디자인을 직접 코드로 구현하며 결과물을 완성하는데서 성취감을 얻는다.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디자인 디테일을 다듬거나 코드를 구조적으로 리팩터링 하는 과정도 즐겁다.
사실 한창 개발을 배울 때는 '코딩이 완전히 내 적성이구나, 컴공과를 갔어야 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때는 한창 추상적 형용사가 가득한 피드백 속에서 이유 있는 디자인을 찾기 위해 애쓰던 때라 논리적 구조를 고민하며 만들어가는 코딩 작업이 스트레스 해소제와 같았다.
이런 성향 때문에 디자인할 때도 기획의 흐름이나 스토리라인이 매끄럽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내용을 다듬어 더 효과적으로 시각화하려고 애썼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러 곳에서 기획 업무까지 함께 맡게 되었다.
재택근무로 혼자 일하는 것도 나와 잘 맞는 일이다. 지금은 프리랜서로 집에서 일하며 나의 길을 찾는 중이다. 멀미 때문에 출퇴근이 큰 스트레스였는데 이제는 그런 부담이 없어졌고, 매일 뭘 입고 가야 하나 고민하는 일 없이 내 공간에서 일에 집중할 수 있어 만족스럽다. 무엇보다 언젠가 디지털 노마드로 해외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도 크게 한몫하고 있다.
Q. 주변에서 잘한다고 칭찬받은 것?
A. 주변에서 잘한다고 칭찬받았던 건 주로 정리정돈과 같은 일이다. 나는 물건이 아무렇게나 나와있는걸 잘 못 참는다. 집에 있는 모든 물건은 제자리가 있다. 같은 기능의 물건은 웬만하면 하나씩만 가지고 있는 미니멀리스트이지만, 동시에 잡다하게 필요한 물건의 종류가 참 많은 맥시멀리스트이기도 해서 결국 정리는 필수가 되어버렸다. 웃긴 건 이미 정리된 공간도 그냥 두질 못한다는 거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도 괜히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이걸 조금 옮기면 더 편하지 않을까?” “이건 다른 방식으로 두면 더 깔끔하지 않을까?” 하고 혼자 고민한다. 이것저것 시도를 많이 하다 보니 정보가 많아 주변에 정리템이나 효율적인 꿀템들을 잘 소개하는 편이다.
돌이켜보면 이런 성향 덕분에 정리하고 구조화하는 일이 나랑 잘 맞았던 것 같다. 일상이든 일이든, 결국 나는 복잡한 걸 단순하게, 어지러운 걸 질서 있게 만드는 과정에서 재미를 느끼는 사람인 것 같다.
Q.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 경험?
A. 나는 대체로 누군가를 돕는 걸 좋아하고 가까운 사람들 일에는 물불 안 가리고 팔을 걷어붙이는 스타일이다. 잡다한 스킬들이 많다 보니 도와줄 수 있는 것이 많다. 그래서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갖기 전에도 수많은 로고 디자인, 명함 디자인, 간판 디자인, 광고물 디자인 등을 신나게 재능기부 하던 시절이 있었다.
또 내가 잘 아는 걸 누군가 모른다고 하면 그냥 못 지나친다. 열정 과다 모드가 켜져서 몇 시간이고 설명해주곤 한다. 그래서 주변에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던 지인에게 몇 시간씩 상담을 해주기도 하고, 한창 피그마를 배워가던 때에는 팀원들에게 짬 날 때마다 새로운 걸 알려주며 함께 성장하던 때도 있었다.
이렇게 쭉 적어보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제 이것들을 토대로 지피티와 대화하며 퍼스널 브랜딩을 구체화시키고 그 과정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