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차 속에 거인을 가두는 법

by JESSIE HEO

엄마는 나를 가졌을 때 돈키호테로 태교를 했다고 한다. 그 무모한 기사의 이야기가 태동기부터 내 혈관을 타고 흐른 탓인지 내 인생은 객관적인 사실보다는 주관적인 진실을 선택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특히 언어를 다루는 업을 이어오며 깨달은 가장 서늘하고도 위대한 진실은 이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이름붙이느냐에 따라,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의 정체가 바뀐다는 사실 말이다.


지표성(Indexicality)과 운명의 결정권


언어학에는 '지표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언어가 단순히 대상을 가리키는 것을 넘어, 그 대상과 화자의 관계, 더 나아가 화자의 정체성까지 드러내는 성질을 말한다.

돈키호테가 들판의 풍차를 향해 "저것은 거인이다"라고 외치는 순간, 언어학적으로 그것은 단순한 오판이 아니다. 그것은 지표적 선언이다. 풍차를 '거인'으로 지칭함으로써, 그는 스스로를 '비루한 노인'에서 '거인과 싸우는 기사'로 탈바꿈시킨다.

나의 10년 또한 끊임없는 명명의 투쟁이었다. 번역가 시절, 나는 단어 하나를 두고 며칠을 앓아눕곤 했다. 남들이 보기엔 고작 비슷한 뜻을 가진 유의어 사이의 고민이었겠지만, 나에게 그것은 내가 통과하는 세계에 어떤 이름을 붙일 것인가를 결정하는 기사의 의식이었다. 내가 마주한 고통을 '장애물'이라 부를 것인가, 아니면 '수업료'라 부를 것인가. 내가 겪는 고립을 '외로움'이라 명명할 것인가, 아니면 '고결한 몰입'이라 명명할 것인가. 내가 선택한 단어 하나가 곧 내가 살아야 할 세계의 온도를 결정했다.


풍차라는 사실, 거인이라는 진실


현실주의자들은 나를 '고등학교를 자퇴한 미완의 존재'라 불렀다. 제도라는 안전한 성벽을 이탈한 나에게 세상은 '결핍'이라는 지표를 붙였고, 그것은 분명 거부할 수 없는 객관적인 풍차였다. 하지만 나는 엄마가 읽어준 돈키호테의 가르침을 따라, 그 낙인을 '독립'이라 부르기로 했다. 남이 써준 대본을 읽는 삶을 끝내고, 나만의 언어로 세상을 서술하겠다는 기사다운 선언이었다.

또한, 한 우물을 파지 못하고 수많은 취미를 전전하던 나의 산만함은 '방랑'이라는 근사한 이름을 얻었다. 끈기 없는 성격이라는 풍차를 '경계 없는 탐험'이라는 거인으로 재정의하자, 내가 거쳐온 모든 실패한 취미들은 언어의 풍요로움을 지탱하는 든든한 배경지식이 되어주었다.


만약 내가 학교를 떠나던 그 시간을 '낙오'나 '이탈'로 명명했다면, 나는 평생 제도의 언저리를 겉도는 패배자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정해진 문법을 거부하고 나만의 사전을 써 내려가는 '독립'이자 '기사 시험'으로 정의하는 순간, 사회적 공백기는 세상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치열한 수행의 시간이 되었다.또한, 한 우물을 파지 못하고 수많은 길을 기웃거렸던 나의 산만함에 '끈기 부족'이라는 풍차 대신 '경계 없는 탐험'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러자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던 잡다한 경험들은 언어의 이면을 채우는 풍성한 주석이 되었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나만의 무기가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내 사고의 한계를 결정지은 것이다. '자퇴생'이나 '포기자'라는 사실의 감옥에 갇히지 않고, '독립가'와 '탐험가'라는 진실을 창조해낸 것. 그것이 내가 10년 넘게 타인의 시선이라는 풍차에 휘둘리지 않고 나만의 언어 영토를 지켜낼 수 있었던 유일한 갑옷이었다.


우리 모두는 자기 인생의 언어학자다


결국 인생이란 끊임없이 밀려오는 '사실'들에 나만의 '이름'을 붙여가는 과정이다. 돈키호테가 풍차를 거인이라 불렀기에 그의 여정이 문학적 영생을 얻었듯, 나 역시 내 삶의 난관들을 거창하고도 우아한 이름으로 불러주려 한다. 이제 나는 안다. 내 앞에 놓인 것이 풍차인지 거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중요한 것은 내가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기로 선택했는가, 그리고 그 이름에 걸맞은 용기로 창을 치켜들었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오늘도 내 인생의 갈림길마다 가장 기사다운 단어를 고른다. 엄마가 태교로 들려준 그 무모한 이름들이, 결국 지금의 '원더스피크'라는 견고한 성을 지어 올렸음을 믿기 때문이다. 인생의 시제는 냉정하지만, 명명의 권한은 오직 나에게 있다. 두 언어 사이 어딘가에서,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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