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건조기

당신이 가지고 싶은 것들을 딸에게 사주는 마음

by Jessie


KakaoTalk_20220817_211707605.jpg @엄마와 샛별이

아이를 낳고 얼마 뒤, 친정과 가까운 곳에 전셋집을 구했다. 혼자 오롯이 아이를 본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자주 내 곁을 비웠던 남편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 외로운 서울보다는 고향이 있는 작은 시골 동네에 자리를 잡는 것이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보낸 5년의 시간은 꽤 바쁘고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서울은 다양한 선택권과 정부의 지원이 존재하는 곳이었기에 가진 돈이 넉넉지 않는 우리도 전셋집을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만은 않았다. 적어도 그 시절의 우리에게는 말이다. 혼수를 채워 넣기보다는 신혼에 걸맞게 깨끗하고 옵션이 많은 집을 선택했다. 세탁기, 냉장고, 에어컨처럼 큰돈이 들만한 것들은 이미 갖춰진 집이었기에 우리가 큰돈을 주고 샀던 것은 가구 매장에서 보았던 침대와 시스템 헹거 그리고 컴퓨터 책상 정도였다. 어쩌면 정리할 것이 많지 않았기에 서울의 신혼집을 미련 없이 정리하고 엄마 곁인 시골로 내려올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아이를 낳고 병원에 있는 조리원에서 회복을 하는 동안 남편은 한국으로 들어와 우리가 함께 살 수 있는 전셋집을 구하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전세 매물이 꽤 많았던 신혼 때와는 달리 작년 한 해는 집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전세 매물이 귀하던 때라 옵션이 많은 집을 구하긴 너무나 어려웠고 더군다나 강아지와 함께인 우리에게 기쁜 마음으로 집을 내어주는 임대인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이나 힘들었다. 겨우 조건에 맞는 집을 구했을 땐 우리는 텅 비어있는 집의 가전, 가구를 하나부터 열까지 채워 넣어야만 했다. 신혼 초에 고민해야 하는 것들을 뒤늦게 맞닥뜨리면서 돈을 버는 것은 어렵지만 쓰는 것은 눈 깜짝할 새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IMG_0011.JPG @엄마와 함께 간 석굴암의 단풍


이사 준비를 하며 하나 둘 짐을 싸고 있을 때 엄마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이사 준비는 잘 되어가는지, 가전제품은 언제 들여놓을 것인지를 물으며 통장으로 300만 원을 보내 두었으니 건조기를 꼭 사라는 당부를 했다. 아기가 있는 집은 빨래를 자주 해야 하니 건조기가 꼭 필요할 거라고, 이 것밖에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임신을 하고부터 아이를 낳고 전세를 구하던 반년 동안 우리 가족은 친정 엄마의 좁고 낡은 아파트에서 염치없이 신세를 졌다. 성인 5명과 갓 태어난 아기 그리고 강아지 한 마리가 북적거리는 집에서 엄마는 매일같이 빨래를 했다. 막노동을 하고 들어오는 아빠, 먼 곳으로 출퇴근하는 사무실 막내 남동생, 땀에 젖은 작업복으로 돌아오는 엄마 그리고 아기를 돌보느라 매일 모유와 아기의 침으로 범벅이 되는 나와 남편의 옷가지까지 우리 집의 오래된 드럼 세탁기는 꾀병 한 번 부리지 않고 매일 일을 했다. 빨래가 다 돌아간 늦은 밤이면 엄마는 늘 베란다로 나가 천장에서부터 길게 늘어진 빨래 건조대에 부지런히 옷가지들을 널었다. 아기 세탁기에서 따로 세탁된 아기와 나의 옷은 모든 이들이 잠든 밤이면 거실 한가운데 넓게 펼쳐져 선풍기 바람을 쐬며 말랐다. 비가 오거나 우중충한 날이면 엄마는 작은 방 하나에 큰 빨래 건조대를 가져다 놓고 제습기를 돌렸다. 출근을 하면서도 빨래가 중간중간 잘 마르고 있는지 확인하라는 당부와 함께 말이다. 그런 수고스러움 덕분이었는지 하얗고 보송보송한 빨래들은 매일 각자의 자리로 빠짐없이 돌아갔다. 저녁밥 준비와 빨래를 마치고 나면 엄마는 밤 10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소파에 앉아 숨을 돌렸다. 그게 지난해 여름, 우리 가족의 모습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건조기에 대한 이야기를 익히 들었던 엄마는 나에게 그 요물 같은 전자제품을 꼭 사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버튼만 몇 번 누르면 빨래가 마르지 않아 눅눅한 냄새가 날 걱정도 없고 손목이 아플 염려도 없는, 그 녀석이 있으면 딸의 수고로움을 금세 덜어줄 수 있을 거라 믿으면서 말이다. 한 달 월급이 훌쩍 넘는 돈을 건네면서도 더 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엄마의 마음을 받아 들고 오면서 언젠가 나도 당신에게 꼭 건조기를 사주겠노라고 마음먹었다.


가끔 엄마는 무심한 듯 묻는다. 건조기를 써보니 얼마나 편리한지, 빨래는 금방 마르는지, 손목이 아프지는 않은지 말이다. 엄마의 질문에 묻어있는 순수한 호기심이 고맙고 또 사랑스러워서 나는 건조기를 쓰고 삶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잔뜩 신이 난 얼굴로 늘어놓았다. 덕분에 아기 옷은 매일 보송보송한 향기를 풍기며 자기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오늘도 엄마는 빨래대 가득 빨래를 널며 나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건조기에서 빨래를 꺼내오며 매일 내가 엄마를 생각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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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철들지 않은 30대.

걷고 마시고 새로운 사람과 이야기 나누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

손으로 써 내려가는 것들은 모두 따뜻한 힘이 있다고 믿는 사람.

그래서 여전히 쓰는 일을 멈추지 않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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