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만의 협재 그리고 게스트하우스
서른에 처음 시작한 사회 생활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수습을 뗀지 한 달 만에 퇴사를 결심한 것은 예전처럼 더 이상 옳지 않은 일을 견뎌야 할 이유가 없을 거라 생각한 것이 첫번째였지만 월급루팡처럼 보람없이 채워지는 지갑으로 살고 싶지 않음은 또 다른 이유였다. 답답한 마음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던 찰나에 나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비행기 티켓을 결제하고 있었다. 떠나야만 할 것 같은 그 어떤 느낌에 이끌려 말이다. 떠남이 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서른이 되기 전 경험한 무엇을 통해 알 수 있었던 사실이지만 이번만큼은 그래야했다. 나에겐 짙은 위로가 필요했으니까.
나와 제주의 인연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2시절, 담임선생님과의 진로 상담 중 알게 된 제주대학교의 이름을 듣자마자 내 가슴은 뛰었다. 사람을 만나는 일을 좋아하던 나에게 '관광학과'의 진로는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그렇게 육지에서 섬으로 건너가 마치 '일상을 여행처럼'의 슬로건 같은 삶을 3년 남짓 살아냈다.
"육지따이가 무사 제주완?"
처음 듣는 제주 사투리는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특히나 학교생활을 하며 짬짬이 걸었던 올레길에서 만나 뵌 할머님들의 사투리는 30%밖에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제주는 한국 속의 외국이라 불릴만 한 곳이었다. 투박해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피부로 와닿았던 제주 사람들의 따스함은 타향생활의 외로움을 잊을만한 생소한 감정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제주도를 가슴 한 켠에 묻어두고 지내며 오랫동안 그리워하게 된 것은 말이다.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오면 제주로 여행을 떠나겠다 다짐했지만 가난한 여행자의 삶을 살던 나에게 제주로의 여행은 사실 꽤 오랜 시간동안 사치였기에 쉬이 결정할 수 없는 무엇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7년이나 흐른 지금 제주행 비행기를 겁없이 저지른(?) 것은 어렵사리 한국행을 결정해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작은 선물이자 위로였다.
4박 5일의 뚜벅이 여행자가 가장 먼저 떠올린 곳은 제주에서 가장 아끼는 '협재 바다' 였다. 10년 전 친구들과 방문했었고 그 언젠가 시간을 공유했던 이와 함께 바라보았던 비양도가 다시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서쪽에 자리한 협재 바닷가에서 바라보는 비양도의 석양이 얼마나 아름다운 지는 그 것을 본 사람만이 알게 되는 비밀스러운 풍경, 나는 그 비밀스러운 것을 홀로 꺼내보는 은밀하고 작은 기쁨을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7년 만에 찾은 제주는 꽤나 변한 모습이었다. 처음 보는 '육지스러운' 상점들과 우후죽순 생겨난 건물들은 나에게 위화감을 주기에 충분했는데 다행스럽게도 바다와 비양도의 풍경만큼은 10년 전, 7년 전과 같은 모습이었기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것 같다. 커피 한잔을 마시며 바라본 비양도의 풍경은 뭐랄까 가슴을 다시 뛰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뚜벅이 나홀로 여행자의 몸과 마음을 쉬일 만한 곳을 찾던 중 발견한 에어비앤비의 작은 게스트하우스는 나에게 맞춤화된 공간이었다. 깔끔하고 정갈한 방 한 칸과 석양을 보기에 적절한 위치 그리고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스팟과 심심하게 떨어진 위치까지도 말이다. 사실 더할나위 없이 좋았던 공간은 게스트하우스 호스트가 운영하는 숙소 바로 옆 Book&pub인데 소수의 사람들만을 수용하는 조용한 서재였다. 이 숙소에 머물게 한 결정적인 장면은 바로 이 서재의 루프탑에서 바라보는 석양이었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지쳐있는 마음이 금새 치유될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그렇게 어렵고도 충동적으로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해버린 것이다.
낯선 사람의 방에 머무는 일을 꽤 좋아하는 편이다. 나와는 다른 삶을 사는 이의 일상을 공유하는 일은 그 누군가의 삶과 내 삶의 모습이 그리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일이고 그 속에서 삶의 모습은 궁극적으로는 비슷하게 닮아있다는 것을 알게되는 위로의 과정이기에. 낯설지만 따뜻한 공간에 내가 녹아드는 그 묘한 1분의 줄다리기 같은 감정을 즐긴다. 특히나 이번에 머물렀던 공간은 더더욱. 제주스러운 돌담집의 미닫이 문 너머로 시작되는 고즈넉한 마당과 한 켠에 자리한 작은 연못은 제주를 사랑하는 신혼부부의 마음이 담겨있는 공간처럼 보였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안내된 1인실의 방은 홀로 여행하는 여행자를 위한 과하지 않은 인테리어였고 잘 개어진 이불과 벽에 붙어있는 엽서까지도 무엇하나 지나치지 않고 따스했다. 폭염경보가 올해 처음으로 내렸다는 소식을 이미 들으셨는지 방은 시원한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던 상태였는데 방에 들어서자마자 녹아버리는 몸을 방바닥에 뉘이고서는 오래오래 창 밖의 햇살을 바라봤다.
해질녘이 되어서야 슬금슬금 옷을 주워입고 밖으로 나선 나는 관광객들이 몰려있는 모래사장이 아닌 동네 주민분들의 삶의 터전에 자리한 포구에 홀로 앉아 오래오래 해지는 풍경을 바라봤다. 마음에 맞는 음악이 흘러나오면 그 장면은 마치 '비긴어게인'처럼 하나의 영화가 되곤 하는데 서태지가 원곡으로 불렀던 '모아이'라는 노래를 어반자카파가 다시 리메이크 한 곡을 반복재생 하며 나는 꽤나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작은 방파제로 걸음을 옮기는 청춘의 그림자를 보며 인간이 비로소 아름다워지는 때는 자연과 어우러지는 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날의 그 석양은, 하루동안 폭염경보를 기록할만큼의 이글거리는 해가 저무는 풍경이었으니 그 어느 때보다 붉디 붉었을테고 그 석양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청춘들에게는 반짝이는 꿈들이 있었을테니 말이다.
저무는 해를 보내고 비로소 도착한 '알로하서재'는 내가 머무르던 숙소의 호스트가 함께 운영하는 책방으로 가벼운 주류나 커피를 즐길 수 있는 곳이었는데 사색과 휴식의 테마를 가지고 제주로 향했던 나에게는 더할나위 없는 장소가 아니었을까. 지는 석양을 뒤로 하고 들어선 서재는 책을 읽기 좋은 음악과 온도 그리고 편안해지는 아늑한 책 냄새를 담고 있었다. 여행자들을 위한 공간을 선물하고 싶었다는 호스트의 취지처럼 그 공간에서 나는 더할 나위 없는 '휴식'을 취했다.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화이트 와인과 취향을 저격한 책들 덕분에 하루종일 제대로 먹은 음식 하나 없었지만 가슴 알알히 박히는 아름다운 책 속의 구절들을 곱씹으며 가득 채워진 마음으로 마감 시간까지 그 공간을 즐길 수 있었다.
몇 년째 나는 혼자하는 여행을 고수하고 있다. 이미 나를 오래 봐온 주변에서는 혼자 여행하는 나를 익숙한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회사 동료들은 나의 그런 모습에 의문과 함께 감탄사를 던지곤 한다. 하지만 머리가 복잡한 시간일 수록 오롯이 혼자서 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고독하고 적막한 자연 속에 빠져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서른의 지금은 바야흐로 혼자 여행을 떠나야만 했던 타이밍이었다.
낯선 공간에서 잠이 드는 일은 나에겐 꽤나 익숙한 일이었지만 적잖은 두근거림이 포함된 습관. 적당한 온도를 설정해 두고선 피부에 닿는 감촉이 좋은 이불을 덮고 책방에서 다 읽지 못한 책의 뒷부분을 눈으로 따라 읽어내려 간다. 지금 이 순간과 이 공간에서 느끼는 감정들은 책을 쓴 이의 감성과 무척이나 닮아있다. 오늘 처음 만난 누군가와 같은 지붕 아래서 다른 꿈을 꾸며 잠들겠지만 익숙한 것이라곤 내 자신 뿐인 어쩌면 내 자신조차도 어색해지고만 이 공간에서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기 위해 홀로 떠나온 것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매듭을 짓다 잠에 빠져들었다. '낯설다'는 단어의 그 어떤 '신비스러움'이 좋다.
내가 아직 마음에 드는 문장을 쓰지 못하고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은,
내가 충분히 고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 최갑수
책 속에서 발견한 이 간결한 문장으로 나는 충분히 고독해야 하는 이유를 찾았다. 홀로됨으로써 느끼는 고독의 즐거움과 더 나아가서는 곁에 있는 누군가에 대한 소중함을 위해 마음이 동하는 때면 나는 가방을 둘러 메고 훌쩍 떠나곤 한다. 혼자인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함께인 시간을 잘 보낼 수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리운 누군가의 체온을 떠올리며 잠이 든다. 홀로 떠난 여행에서는 언제나 사람이 그립다. 그 애뜻한 그리움이 다시금 당신과 나의 사이를 견고하게 만들어 주리라는 것을 믿기에 아마 나는 늦지 않게 또 다시 홀로 여행을 떠날지도 모르겠다. 겨울의 협재는 어떤 모습일지를 상상하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