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있는 가족들을 위한 선물과 같았던 장례식이었다
장례식은 마치 잔치날 같았다.
몇년째 못 보았던 친척들이 장례식장에 모였다. 할머니의 손주들 중 일부가 결혼을 하고, 또 자식들을 낳으며 스무명도 훌쩍 넘는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도 있었다. 아기가 처음보는 셋째 작은 아버지한테 자꾸 가서 안기는 모습을 보면서 친척들이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오랜만에 이렇게 다같이 모였습니다. 장례식은 슬퍼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하하호호 해야 한다는 말이 있던데, 그 말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다행이었다. 작은 아버지 한 분은 할머니가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일, 좋은 선물을 주고 가신것 같다고 했다.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보았다. 할머니는 생전에 영정사진을 찍으셨다고는 하는데 미처 찾지 못하고 할머니의 젊은 시절 흑백 사진이 영정사진이 되었다. 사진 속 할머니는 두 눈동자도 똑바르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 할머니는 오토바이 사고로 인해 한쪽 눈동자가 측면으로 삐뚤어졌었다. 사진 속 할머니의 30~40대 모습인것 같았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말끔한 할머니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마음이 아려왔다. 저런 예쁜 모습이 있었구나.
장례식장 화면에 뜬 할머니의 나이 88세... 다른 호실은 아흔이 넘거나, 백살을 훌쩍 넘으신 분의 장례를 치르던데, 아흔도 채 못 넘기시고 이 좋은 세상을 떠나신 게 너무 속상해졌다. 나이를 보니 할머니는 첫 손녀인 나를 48세에 보신거다. 쉰도 안되어 할머니가 되었다. 우리 아빠를 열아홉에 낳으셨다고 했었다. 내가 올해 마흔 하나에 이제 겨우 만 다섯살 아이를 키우고 있는데... 할머니는 너무 어린 나이에 아들만 다섯을 낳고 얼마나 무거운 삶을 사셨을까 싶어서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여럿 장례식을 다녔지만, 내 가족의 장례식은 두번째였다. 내 사랑하는 강아지, 들레를 떠나보낸 것을 포함하면 세번째이다. 첫번째 할아버지 장례식은 내가 대학교 4학년 때였는데 기억이 잘 안난다. 그때 많은 집들이 힘들었다. 우리도 IMF 이후 힘들어진 가세를 영 회복하지 못했다. 우리 할아버지도 워낙 젊으셔서 그때 막 칠순이셨나 그랬을거다. 신장 투석을 오래 하셨지만, 너무 이르고 갑작스러운 죽음에 가족들이 많이 황망해하고 힘들었다. 3월 초의 차가운 산바람이 기억난다. 화장을 안하고 할아버지를 묻었는데 오열했던 기억도 있다. 장례식이 끝나고 부조금 때문인지 아빠 형제들 사이에 싸움도 났다는 얘기도 나중에야 알았다. 하지만 십수년이 지난 할머니 장례식은 우리 가족들의 형편이 다들 좋아졌다. 아빠는 이 장례식장에서 가장 좋은 호실을 계약했고, 작은 엄마들과 사촌들이 밤에 지내기 편하게 호텔도 가장 좋은 객실로 예약해 두었다. 다들 할머니를 기억하고, 옛 이야기를 하고, 요즘은 어떻게 사느냐, 이야기꽃을 피우고 웃기 바빴다. 단 한번도 눈살 찌푸리는 대화가 오고가지 않았다. 발인이 끝나고 다들 너무 고생했다며 애틋한 인사를 건네고 헤어졌다. 2월에는 사촌 동생의 결혼식이 있으니 그때 또 보자며 헤어짐의 인사가 자꾸 길어지는 것도 즐거웠다.
장례식 이틀차, 입관할때 나는 처음으로 죽은 이의 모습을 보았다. 평온하게 자고 있는 모습이었다면 좋았으련만... 요양원에 2년 넘게 계셨던 할머니는 당신의 삶의 모든 무게를 주름 하나하나에 새긴듯 했다. 그 표정은 당신의 쉽지 않았던, 외롭던 삶을 다 떨쳐내시지는 못하였다. 이제 조금 편안해 지셨나요, 이제는 모두 내려놓으시고 가세요... 우리 할머니는 원래도 자기마한 체구셨는데 입관할때 본 할머니의 모습은 너무나도 작아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아빠, 엄마, 작은 아버지, 어머니들, 친척들은 서럽게 곡소리를 냈고 오열했다. 넷째 작은 아버지는 할머니의 얼굴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으며 슬픔을 토해냈다. 첫째인 우리 아빠도 이제 곧 칠순인데, 세월이 흐르고 흘러 중장년이 된 할머니의 5형제가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아팠다. 다들 무뚝뚝한 아들이었겠으나, 낳으시고 길러주신 어머니의 죽음의 아픔은 아직은 내가 감히 이해하기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다.
입관 후에서야 사람들이 슬슬 찾아오기 시작했다. 넓은 장례식장이 꽉 찼다. 요즘은 장례식장에 다 일하시는 분이 계셔서 가족들도 그냥 손님만 맞으면 된다. 장례식장에서 뛰놀던 아이들은 올케와 남편에게 부탁하여 키즈카페로 보냈다. 막내 삼촌의 딸, J는 사귄지 6개월 된 남자친구가 왔고, 곧 2월에 결혼을 앞둔 둘째 작은 아빠네 아들 JH의 예비신부도 찾아왔다.우리 시어머니와 아주버님, 큰형님도 왔다. 어릴때 자주보던 아빠 친구들도 훌쩍 나이 드신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나중에 조의금을 정리하며 '이 아저씨는 돈도 많은데 부조를 5만원만 했어?' 농담 삼아 엄마한테 얘기했는데, 지난 세월 간 말못할 사연들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어쩌면 그저 어른이 된 것만 같은 시간인데, 장례식에서 오랜만에 본 아빠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 세월 동안 다들 소설같은 사연들이 가득했다.
아빠는 5형제인데, 다섯 형제가 나란히 서서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은 장례식날 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지만... 든든하고 멋져보였다. 사촌들도 너도 나도 그런 얘기를 했는데, 이제 한둘 정도 낳는 우리 세대가 나중에 세상을 떠날때 우리 자식들은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남동생과 차를 타고 오는 길에도 남동생이 그랬다. 아주 나중에 내가 상주가 되면 할일이 너무 많아 보인다, 생각도 많아진다, 더 건강하게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했다. 수많은 감정과 생각들이 가득한데 그 몇마디 말만으로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저녁시간이 지나고 더 이상 손님도 찾지 않는 장례식장은 조금씩 슬픔의 적막이 뒤덮혔다. 첫날엔 그저 만나서 반가웠던 친척들인데 이제서야 할머니의 죽음이 느껴진 듯 했다. 여기저기 앉아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나와 아빠, JH는 조의금 상자를 열고 조의금을 정리했다. 아빠와 작은 아빠들, 그리고 남자 사촌 동생 몇명들이 장례식장을 지키고 우리는 각자 숙소로 향했다. 할머니가 시집와서 거의 평생을 사시던 집은 팔았다고 했다. 이제 독수리 5형제 같은 우리 아빠 형제들과 친척들이 영주에서 모일날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어릴 때 10명이 넘는 내 사촌들과 추석 때 잠자리와 방아깨비를 잡아 와서 할머니 방에 풀어놓고 놀던 일들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 추억들은 할머니가 이 세상을 떠나면서 정말이지 다시는 꺼내보기도 힘든, 저 먼 기억 속으로 깊숙히 가라앉는 것 같았다.
발인하던 날은 다행이 날씨가 따뜻했다. 전날은 살을 에는듯한 바람에 너무 추워 다음날이 걱정될 정도였다. 할아버지를 보낼때의 그 차갑고, 축축했던 초봄의 공기가 더욱 슬픔을 무겁게 했다면 마치 봄날씨 같았던 공기에 마지막 할머니를 보내는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보던 장면들 속에 내가 들어간 것 같았다. 할머니의 5형제의 가족들은 미니버스를 가득 채우고도 남아 몇대의 차가 더 따랐다. 화장장도 처음이었다. 시립 화장장에 가서 화장을 했는데 우리 할머니는 체구가 작으셔서 그런지 1시간 남짓 걸렸다. 탈상은 화장장에서 다 했다고 했다. 요즘은 이렇게 간단하게 3일장이 끝난다고 했다.
할머니는 정말 한줌의 유골로 돌아왔다. 할아버지의 묘에 합장을 했다. 할아버지 산소 옆을 파서 묻어드렸는데 관이 아니라 깊게 파지도 않았다. 이상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다시 만나는게 어떨까? 엄마와 작은 어머니들은 할아버지와 오랜만에 만나실 할머니가 좋아하실지, 안 좋아하실지 모르겠다며 그래도 살짝은 웃을 수 있었다. 장남인 우리 아빠부터 손주 며느리인 TH의 아내까지 그자리에 있던 단 한명도 빠지지 않고, 할머니의 유골 위로 흙을 덮었다. 묘 구석구석을 손으로 매만지는 자식들의 손끝에는 슬픔이라기 보다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장례지도사가 "이렇게 다 끝났습니다." 하는데도 우리의 발걸음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할머니 안녕히 계세요, 편히 쉬세요...
지금도 아이는 키즈카페에 보내고 바로 앞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 글을 쓰고 있지만, 할머니의 죽음은 비현실적이다. 할머니가 엄마처럼 키워준 것도 아니라, 여느 할머니같이 명절과 생신 때 보고 가끔 찾아가는 정도였지만 나의 핏줄의 근원인 할머니의 죽음은 내 인생의 너무 큰 아픔이다. 2박 3일간의 할머니의 장례식은 슬프지만 슬픔보다는 어쩌면 한편으로 김씨 식구들이 오랜만에 만나 우리가 가족이구나를 느꼈던 즐겁고도 소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장례식은 그래서 작은 아버지 말처럼 돌아가신 어르신이 가족들에게 주는 선물인 것 같았다. 그래서 잊고 싶지 않고,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어 글을 쓴다. 할머니 사랑해요, 자주 못 뵈러 가서 너무 죄송해요... 할머니 부디 그곳에서는 행복하고 평온하게 지내세요... 나중에 또 만날 날에 그때는 함박 웃음으로 맞아주세요...
어제 할머니를 산에 묻고 왔는데, 안타깝게도 제주항공 사고로 또 많은 사람들이 황망하게 가족들 곁을 떠났다는 뉴스를 보고 또 한번 현실이 무너졌다. 쇼핑몰의 음악소리, 옆 테이블의 웃음소리도 공허하게 느껴지는 이 순간이다. 뉴스는 여전히 계엄이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2024년의 마지막은 너무나도 힘겹다. 마음에 큰 구멍이 뚫린 것 같은 시간들이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기에, 글을 남기며 나도 나를 추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