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바쁘게 사느라 브런치를 많이 못썼습니다. 원래도 바쁘게 살았지만 5년차가 되니까 (그리고 서른줄에 가까워 오니까) 무한해보이는 시간과 가늠할수 없는 가능성이 벅찼던 10대 후반-20대 초중반과는 너무 다르네요. 갈수록 책임이 늘고 예전에는 일을 찾아서 했다면 이제는 제가 문을 걸어잠궈도 일이 잠금쇠를 부수고 찾아옵니다.
종종 밤도 새고 밥도 못먹고 일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살면서 최근에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뭐가 그렇게 바쁘냐" 입니다. 주로 연인, 가족,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게되는데 보통 이거때문에 많이 싸웁니다. 바쁜 사람은 바쁜게 당연해서 뭐때문에 바쁜지 일일히 설명해줄 능력과 여유가 딸리고, 기다리는 사람은 그건 그거대로 빡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시간에는 세상에서 제일 바쁜 사람들과 그들은 뭐가 그렇게 바쁜지... 설명해주도록 하겠습니다
1. 내가 또는 상대방이 "바빠서" 헤어져 본 사람
2. "너는 나보다 일이 먼저인거 같다" 라는 말을 해본 사람 또는 들어본 사람
3. "이동할때나 화장실갈때 카톡은 답할수 있잖아" 라는 말을 해본사람 또는 들어본 사람
4. 내 지인/연인은/가족은 뭐때문에 그렇게 바쁜지 너무 궁금 함
5. 나도 일을 하고 쟤도 일을하는데 전문직도 아니고 바쁜 이유를 모르겠음
*물론 바쁜건 벼슬이 아닙니다. 이 글을 내가 이렇게 바쁘니 집안일 신경쓰게 하지 마 이런 방어기제로 사용하지는 맙니다. 집에서의 내 역할이 있고 사회에서의 내역할이 따로 있습니다.
1. 대기업 대리급
- 드라마에서 보면 바쁜 사람 페르소나의 직업은 다 대기업 대리입니다.
회사의 모든 일을 대리가 한다라는 말은 그냥 있는 말이 아닙니다. 성과 압박이 생겨나고 사회 초년생 신입급도 사수로서 챙겨줘야되고, 실무를 다 하느라 직속 팀장하고 커뮤니케이션도 자주해야되고, 성품도 좋아야되고, 거래처랑 연락도 리딩해야되고, 회식도 해야되고, 높은분들한테 발표는 팀장이 하더라도 초안은 이분들이 만들확률이 굉장히 높습니다. 후배도 챙겨주고 선배도 챙겨줘야되서 정작 자기 못챙기는 대리님들이 많습니다 ㅜㅜ
연인이 나를 사랑하는거 같긴 한데 연락이 너무 안온다 하면
이분들이 중간중간 연락을 못하는 이유는 본인도 한다고하는데 정신이 없어서일 확률이 높습니다. 중간에 시간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맘에 여유가 없는겁니다.
이동하다가도 계속 메일과 전화와 문자가 쏟아지고 화장실 가다가도 계속 할일이 머리 속에 맴돌기 때문에 - 그렇게 일해도 시간이 모자라기 때문에 - 연락이 늦는게 많아지고 친구들과의 약속에 정시에 가는 건 꿈도 못꾸는 시기입니다.
2. 개인사업자
- 사업자는 사실 바쁜거도 있는데 개인 인생을 걸고 사업을 하다보니까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바빠지는 것도 있습니다. 특히 들어오는 금액이 규칙적이지 않은데 나가는 금액은 규칙적이다 이러면 더 촉박합니다. (가족일, 월세, 코워킹스페이스 임대료, 어도비 라이센스 등 ... 가끔씩은 구독 경제가 더 안좋은거같기도 ㅠㅠ)
그래도 회사원은 영역별로 일을 나눠서 한다 치는데 개인사업자는 세금도 본인이 내지 외주용역도 본인이 쓰지 영업도 본인이 뛰고 일도 본인이합니다. 유연하게 일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 대신 유연하지 못한 시간표를 얻습니다.
특히 요새는 시대가 변해서 20대 후반 30대 초중반 젊은 개인사업자대표님이 많은데,
주 52시간 근무이고 뭐고 한참 바쁘게 일할 나이 20대 후반 30대 초반, 바쁘게 일할수록 인생의 모든게 30대에 대부분 결정이 되는구나를 알게 되기에 감정만 키우는 사랑이 사치같이 느껴지는 시기입니다. MBTI도 계속 변한다고 누구보다 이상적이었던 사람이 현실적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부모님 집에 살면서 해주는 밥 얻어먹고 청소는 엄마아빠가 해줄수 없습니다. 주택청약도 넣어야하고, 재태크도 해야하고, 우리 모두 꿈을 꾸지만 어찌되었든 본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문제는 미래를 보면서 연애하는 것과 내 미래에만 매몰되는 건 다른데 이 중심 잡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결혼한 사람은 그나마 같이산다 치는데...)
3. 스타트업 대표
- 2번이랑 좀 같으면서 다른게, 제가 스타트업 출신이라 그렇게 느끼는 것도 있겠지만 스타트업 씬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습니다. 가장 순수한 형태의 꿈을 위해 달리고, 투자 결과라는 현실적인 지표로 자신의 비전을 증명해가는 사람들. 회사의 체계, 기존 사람들의 통념, 비용, 이런것들에 연연하지 않고 가장 빠르고 순수한 형태의 진보를 받아들이는 분위기는 아마 스타트업 종사자들의 특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사람들이 바빠지는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일단 대표니까 사업의 A-to-Z 를 다 생각해야되는거도 있지만, 스타트업 특유의 일을 즐기고, 지치지 않고 밤샘하는 문화가 바쁜 사이클을 정당화합니다.
그리고 또 비슷한 사람들이 내 주위에 많다 보니 다들 늦게까지 앉아서 모니터 보고있고, 밤샘 피자 먹으면서 유리보드에 마카로 뭐 쓰면서 아이데이션 하고 있고, 그게 또 재밌고 하다 보니 이게 자연스럽고 "원래다 일을 이렇게 인생 갈아넣어서 하는 거지 취미는 원래 사이드 프로젝트 하는거지" 라고 느끼게 되는 겁니다. 이런 라이프스타일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자연스럽게 이런 삶의 사이클을 받아들이게 되는 분위기가 확실히 있습니다.
4. 컨설턴트
- 삶을 포기하는 대표적인 직군 중에 하나죠...ㅠ
아마 이들의 고액연봉은 시급으로 따져보면 별로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산업군에 대한 공부도 계속해야하고, 극강의 제너럴리스트로서 또 이리저리 분야를 바꾼다 라고 하면 그건 그거대로 인맥 만들고 공부하고 프로젝트도 해야하고 적응해야합니다. 컨설턴트라고 해서 장표만 짜는게 아니고 고객 서베이도 해야되고, 구축하는 엔지니어링 이야기도 해야되고, 고객 요구조건도 맞춰줘야 되는 일거리도 있거니와 이들이 바쁜 이유는 결국 컨설턴트들도 컨설팅 비용을 지급한 고객의 요구를 맞춰줘야 되는 입장이라 그렇습니다. 막 다 똑똑해보이고 멋져보이고 문과출신 중 가장 높은 티어의 직업군이네 뭐네 해도 결국엔 고객이 부르면 와야되고, 고객사가 8시출근이라고 하면 8시 출근을 같이해야되는거죠.
제 두번째 회사의 CEO분은 컨설턴트 출신이셨는데, 2주간 집에 못들어가고 연락도 못해서 여자친구가 화나서 회사 앞에 찾아왔는데 인간의 꼴이 아닌 추레한 본인을 보고 아무말도 못하고 밥 사주고 갔다는 눈물없이 들을 수 없는 일화를 들려줬던 기억이 나네요.
여의도나 강남의 컨설팅 펌 사옥들이 늦은 시간까지 계속 빛나는 이유는 예뻐보이려고 불을 켜놓는게 아니라 그때까지 사람이 일을 해서 그렇습니다.
5. 개발자
- 사실 개발자가 제일 짬이 없어지는 이유는 계속 공부를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기술 스택이 계속 바뀌고, 어느날 기술표준으로 정립된 아키텍처나 프레임워크가 어느날에는 구식이 됩니다. 좀 적응할만 하면 바뀌고 또 바뀌는데 물론 백엔드 프론트엔드 차이가 있지만 예전에 프로그래밍 한 언어를 통달했다고 해서 그 다음 언어를 배우는데 무조건 도움이 되냐 하면 그건 또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게 진짜 사람 미쳐버리게 만드는게, 부모님 집에서 해주는 밥 먹고 빨아준 옷 입고 그냥 내 일에만 재밌게 빠지면 되는 나이에는 발전하는 것도 보이고 힘들긴 해도 그나마 괜찮은데, 내가 자녀를 키운다거나 독립을 해서 내 가구를 책임져야된다거나 취미활동이나 자기계발 모임하고 병행을 해야한다 이 중에 하나라도 해당되면 극강의 타임푸어가 시작됩니다. 괜히 테크 기업에서 사내복지로 재테크 특강을 열어주는게 아닙니다. 일하느라 바빠서 연말정산을 제외하면 본인의 자산을 체크해볼 일말의 시간도 없이 일년을 달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번도 안해본 사람이 예전에 레거시 경험이 있는 사람보다 잘 할수 있다라는 사실은 아마 테크업계의 영원한 매력이자, 동시에 테크업계에서 사람을 탈주하게 하는 원인일 겁니다. (힘들어서..ㅠ) 계속 공부를 해야 한다라는 사실이 직업적으로 이해가 잘 안되는 이유는, 보통 직업군은 같은 일을 계속 하면 지식이 생기고 요령이 생기고 하면서 올라갈수록 여유로워 지는데, 개발자는 그다지 차이 없이 계속 달려야 하는 것도 있고, 사실 일하는 데에 있어서 공부가 필요한 직업군이 많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6. IT기업 종사자
- 이건 사실 회사별로 분위기를 세게 타지만, N플릭스 등 글로벌 테크 기업들의 빡세고 솔직한 업무 문화는 여러 도서를 통해서 미디어적으로도 잘 알려진 바가 있습니다.
태생이 3차산업 중 정보산업은 1차산업처럼 논밭끼고 있는것도 아니고, 2차산업처럼 공장 낀것도 아니고 그냥 사람이랑 컴퓨터만 있는 구조라서 밑천이 없습니다. 오직 나의 노동과 시간뿐 ... ㅠ
일과 별개로 자격증도 가장 많이 따야하고, 대학원도 많이가야하는 직군이 이쪽입니다.
웹, 앱, 서비스 등 무에서 유를 만들고 비즈니스 로직도 만들고 코드도 직접 짜는... 정말 사내 수공업 중의 수공업입니다. 개발자와 비슷한데 이들이야말로 하루 공부해서 하루 먹고사는 직업군인지라... 업무 강도와 별개로 평생 배우고 혁신해야하는 숙명을 타고난 자들인데, 이런 계속해서 배우는 사이클이 힘들어서 그만 두는 사람이 많습니다.
7. K-장녀
- 남녀 갈라치기를 하려는게 아니고 물론 개인별로 다 차이가 있지만 집단 평균적으로 봤을때
누나-남동생이 오빠-여동생보다 남매분위기 집안 분위기가 훈훈하다라는 이야기는 자녀를 키우고 있는 부모님이나 가족생활을 하고 있는 분들은 어느정도 공감을 받습니다.
한국 사회 분위기적으로도 그렇고 관습적인 자녀역할 에 대한 기대, 빠른 사회진출, 개인의 성향 등이 맞물려서 장녀들은 적극적인 가족구성원이 되는거 같습니다. 어느 웹툰 댓글을 보니까 장녀들은 반쯤 미쳐있기 때문에 건드리지 말라 라는 이야기를 하던데 웃프더라고요 ㅠ
마음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 주기도 바쁜 20대 연애에서 사랑도 사치구나 라는 생각을 해본 장녀 분이 있을 겁니다. 상식적으로 사랑과 일이 부딪히면 먹고살기 위해 사랑을 포기하지 일을 포기하지 않는것과 비슷합니다. 결국엔 가족 일에 장사 없습니다.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고 서로를 지지하는 가족이 무너질 위기라는데, 가장이었던 아버지가 정년퇴직을 하시고 집엔 대출이 있고, 자영업을 하면서 고생을 하시거나, 어머니가 완경기에 갱년기라서 마음이 힘들거나, 동생놈의 자식이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데 사랑에만 미쳐있을수 있는사람은 많이 없습니다.
나도 회사를 다니고 너도 가족이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도 무한히 확장을 하기보다는 사람인지라 한계가 있습니다. 뭐가 맞고 틀리다가 아니라 이 사람의 마음 자원이 가족에게 더 많이 쓰일수도 있고 그건 개인 성향일수도 있고 상황 탓일 수도 있습니다. 가족 일로 바쁜 상황을 이겨낼 능력이 없어서 힘드니까 본인 옆에 외로워하는 사람이 안보이게 되거나 볼수 없는 상황이 오는 겁니다.
8. 1-7의 교집합
(K 장녀인데 개발자, IT 기업 종사하는 대기업 대리 등 )
- 안그래도 연애 전에도 시간없었던 분이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는 극도로 시간이 없어집니다. 게다가 1-7번의 교집합이다, 두가지 이상이 복수로 해당된다 이러면..극악의 워라밸이 형성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