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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글안 Dec 27. 2023

K는 어쩌다 정원사가 됐을까

식물에 이토록 진심일수가


직업을 단순히 돈벌이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의지와 상관 없이 직업은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매일 오가는 출퇴근길의 풍경부터 직장에서 부대끼는 사람들의 말 한마디가 그날 하루를 결정짓기도 하니까.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내 업으로 삼는 것은 나에게도 꿈이다. 호기롭게 그 일을 시작하더라도 지속적으로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로또 당첨만큼 어려운 것 같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려면 좋아하는 일의 그 과정부터 재밌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결과 위주가 아닌 과정도 재밌는 일을 찾다가 식물책도 쓰고 유튜브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처럼 식물 관련 일을 하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도 해오고 있다. 인터뷰를 하는 것은 내 새로운 결과물을 위한 과정이다. 이번 12월에는 서울 식물원 정원사 K를 만나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쏟아졌지만 식물에 어떤 매력을 느껴 영하 10도에도 외부 작업을 하는 정원사가 되었는지 그리고 여기까지 오게 된 여정이 궁금했다.




식물에 대한 마음이 뚜렷하지 않은 사람은 오래 일하기 어렵겠는데요? 어떤 계기로 식물을 좋아하게 되셨나요?


K : 저는 뭔가 명확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는, 경쟁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요. 자연은 그냥 보고 있으면 잘 지내고 있는 거 같고, 평화로워 보이더라고요. 경쟁을 하지 않고도 잘 지내는 것 같았어요. 물론 엄청난 경쟁을 하고 있는 상태라는 걸 식물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되긴 했지만요(웃음).


그런 마음으로 살다가 대학교를 휴학했을 때 부모님과 카페를 하게 됐어요. 본가가 평택인데 거기서 의도하지 않게 흘러서 카페를 오픈하면서 재밌는 일들이 있었죠. 저희가 직접 농사를 지은 걸로 브런치 음식을 만들어 판매하기도  했거든요. 그때 직접 농사를 짓고 수확해 보니까 그 기쁨이 엄청 크더라고요. 내가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온 것 같고 그 과정도 정직하게 느껴졌죠. 또 제가 직접 키운 채소로 제철 음식을 해 먹는 것도 굉장히 행복했어요. 자연친화적인 컨셉으로 카페를 운영했어요. 저희가 직접 담근 청으로 음료도 만들고 샐러드와 브런치 메뉴도 만들었어요. 제가 또 가드닝을 좋아하니까 식물을 분갈이해서 팔기도 했고요.



컨셉이 너무 좋은데요?


그런데 잘 안됐어요. 서울에서는 샐러드 열풍이 불던 때였는데 평택은 느리더라고요. 제가 만들어둔 시스템이 부족한 면도 있었고 여러 면에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어요. 저는 중간에 학교에 복학을 해야 해서 부모님 두 분이 운영하셨는데 힘들어 하셔서 결국 카페는 폐업으로 단락을 지었어요. 이런 과정들이 중첩되던  중에 '조경 가든 대학' 교육을 잠깐 들었어요. 식물을 좀 더 알고 싶더라고요. 식물을 알아갈수록 식물에 대한 마음이 더 단단해져서 카페를 뒤로 하고 학교 졸업 후에는 신구대학교에서 운영하는 '수목원 전문가 과정'을 들었어요. 쉽지 않은 시기였는데 다행히 잘 버텼어요. 식물에 대한 제 마음도 확신할 수 있는 시기였죠.


나이 드신 분들도 꽤 오시는데 중간에  포기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50대, 60대 분들도 오셨어요. 교육비는 무료인데 기숙사비를 내고 생활까지 해야 했는데 보조비가 40만원이라 그 돈으로 다 해결하느라 가장 배고픈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거기서 만난 동기 한 명이 있는데 절친이 돼서 지금도 소울메이트로 지내요. 거기서 버티신 분들은 어딜 가시든 잘 적응하세요.  


20대고 어리니까 가능했던 것도 같아요.

맞아요. 다 내려놓고 들어간 거였어요.


어렵게 여기까지 오셨는데 서울 식물원에 와서 '와 이거 너무 좋다'라는 게 있었나요?



저희 식물원에 식물 전문 서적 도서관이 있어요. 그게 너무 좋아요.


저도 가봤는데,  반했어요. 식물 관련 책이 정말 많은데 영문 도서가 생각보다 많아서 놀랐어요.  그거  다 사서 보려면 금액이 어마어마하거든요.


그렇죠. 손이 덜덜 떨려서 못 산 서적들이 있어서 너무 반가웠어요. 원서 보면서 영어 공부를 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몸이 안 힘들 때는 점심마다 가서 1시간씩 꼭 공부하고 내려왔어요. 이 정도 복지면은 말 다 했다 생각해요.


그리고 또 있어요.


꽃의 절정의 순간을 놓치지 않아요. 정원도 꽃도 각각 절정인 시기가 있거든요. 보통 관람객분들은  주말에 시간이 나야 식물을 보러 오시는데 그러면 절정의 순간은 놓칠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항상 관리를 하고 있으니까 절정의 모습을 항상 놓치지 않아서 너무 기쁩니다. 절정의 전후까지 다 볼 수 있고, 절정으로 가는 그 과정도 다 볼 수 있어서 좋아요. 남들이 다 볼 수 없는 것들을 저는 볼 수 있으니까요.


눈이 소복히 쌓인 호수원



짧은 인터뷰 후기


차가운 공기가 맑게 느껴지는 초겨울에 파주 한 카페에서 K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짧고 푸른 잔디부터 높은 하늘을 편히 올려다볼 수 있는 넓은 정원이 보이는 공간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물을 가까이 하게 된 이야기를 듣다 보니 드라마를 정주행하듯 몰입이 되어 누군가의 인생에 잠깐 들어갔다 나온 듯했다.


군더더기 없는 말 속에 진심이 가득했다. 인터뷰가 마지막 질문을 향해 갈수록 이야기는 한 지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자연을 삶 속 깊이 들이고 싶어 하는 삶,  삶에는 일과 삶의 경계가 없었다. 도시에 살지만 종일 식물을 만지고 퇴근 후에는 암벽 등반을 꿈꾸며 실내 클라이밍을 하고, 주말에는 조용한 곳을 찾아 식물 그림을 그린다는 K. 자연주의적인 삶을 동경한다는 말이 삶으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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