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과 퇴사 그 사이, 사실 가장 어려운 '일 계속하기'
나는 꽤 일찍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일을 하며 산다. 이것만으로도 누군가는 나에게 운이 좋은 거라고 했다. 이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지원자들도 더러 만난다. 그들의 바람이 얼마나 강렬한지도 안다. 그들이 보기에 나는 행운아일 것이다. 그런데-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것도
그다지 행복하진 않다
그 모든 사람들에게 미안하지만. ‘일은 일이다’, ‘행복이란 불행의 연속인 두꺼운 책 사이에 끼워져 있는 한 장의 책갈피 같은 것이다’ 따위의 말이 얼마나 위대한 명언인지 매일매일 실감한다.
나를 환희로 이끌었던 그 행위들이 수없이 반복되면 얼마나 지겹고 끔찍하게 느껴지는지를 알았을 때, 그 좌절감은 처참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들이 내 심신을 상처 주고 고통스럽게 할 때 나는 다시 한번 더 좌절했다.
취업의 고난도 겪었고 고통스러운 퇴사도 해봤다. 취업과 퇴사의 어려움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나,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고통스러울 거라고 말해준 사람은 없었다. 미디어는 어째서 ‘좋아하는 일을 해서 행복해요’, ‘취미가 일이 되니 일하는 것도 즐거워요.’ 따위가 가능하다고 나를 꼬셔댔던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도 버티고 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버텨냈고, 당분간은 더 버틸 것 같다. 이 일을 위해 포기했던 수많은 기회들이 아까워서라도 이 일을 끝까지 해내고 싶다.
미리 밝히건대, 이 글은 이 일을 계속할 수 없을 것 같은 순간들을 ‘모면’할 수 있게 해 준 작은 가능성들의 모음이자, 나를 다시 한번 다잡는 다짐이며, 스스로에 대한 위로일 뿐이다. 해답이나 묘안은 아직 나도 모르겠다 :)
하고 싶었던 일이고, 좋아하는 분야였던 만큼, 나에게는 일과 취미가 애매하게 같은 범주 안에 있었다. 퇴근 이후의 저녁과 주말을 채우던 것들이 업무시간 안으로 들어오고 나니 내 일상은 아주 기묘하게 뒤틀렸다. 이전과 같은 방법으로 주말을 보내고 나면 일을 한 건지 쉰 건지 나 자신도 헷갈리고 피곤했다. 돌이켜보면 다시 채워지는 쉼이 아니라 끝없는 방전이었던 것 같다.
긴 업무 인생을 유지하기 위한 배터리를 충전하기 위해서는 꼭 취미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싶다). 소파에 늘어져서 TV만 줄창 보거나, 휴대폰만 붙잡고 있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뇌를 쉬게 하는 활동이 아니라고 한다. 내내 뇌를 괴롭히고 채웠으면 비울만한 활동이 필요한데, 나에겐 그것이 취미생활이었다.
몇 년 전, 처음으로 휴가를 취미생활로 잔뜩 채워 보냈다. 끝없는 야근과 주말근무에 지쳐 휴가 때만 되면 '아무것도 안 하고 쉴 거야'를 되뇌던 나였는데! 취미활동이 주는 '쉼' 효과는 그냥 휴양이나 휴식과는 사뭇 달랐다. 고통스러운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즐겁게 놀면서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방법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음과 일을 완전히 분리시킬 수 있다는 점도 주요했던 것 같다.
오래 일하기 위해서는 '내 생활'이 필요하다
취미생활은 대표적이면서도 가장 지극한 내 생활이다. 친구들의 사례를 봤을 때 가능하면 가까이서, 자주, 원할 때마다 할 수 있는 취미를 가지면 더 효과적인 것 같다.
한동안 '좋아하는 일 하는 사람 병'에 걸렸던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의 실상은 모르는 부러움,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이 큰 성취라는 과장된 인식들. 그래서 나 스스로도 '이 일 아니면 안되.... 지 않을까?'라는 압박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 일 아니어도, 뭐 꼭 안 될 건 없더라?
나는 실제로, 도중에 이- 내가 좋아해 마지않던 이- 일을 때려치우고 한동안 아예 다른 일을 했다. 꽤 인정받았고 벌이도 훨씬 나았다. 저녁이 있는 삶이 얼마나 좋은 지도 경험했다. 이 시절에 '오래 일하며 살 수 있는' 방법들을 많이 배웠다.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내가 하던 '그 일'을 한 발짝 떨어져서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몰입한 상태에서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많은 것들을 그제서야 보고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흔들리는 마음이 없다. 그만둬보지 않았었더라면, 난 지금도 '다른 일 하면 더 잘 살지 않을까?', '내 인생에 다른 선택은 정녕 없었던 것일까?'라는 끝없는 고민만 되풀이 해댔을 것이다.
그 이후로 후배들에게 자주 말한다. "하고 싶은 다른 일을 찾아봐. 근데- 그걸 당장 하라는 건 아니야. 그냥, 내가 다른 일을 할 수도 있다는 그 생각, 그 자체만으로도 더 오래 버틸 수 있을 거야."
등 뒤가 절벽이라고 생각하면 절망적이다. 병법에는 배수진을 치라고도 하지만, 그건 죽기 직전의 마지막 힘을 짜내라는 의미지 오랫동안 싸울 수 있는 방법은 아니다. 등 뒤에 도망칠 길이 있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살 길을 모색하며 오래도록 싸울 수 있다.
이것도 '좋아하는 일 하는 사람 병' 증상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일=나 를 동일선상에 놓는 것. 일이 즐거워야, 일을 잘해야, 일에서 성공해야 내 인생도 잘 굴러가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 나의 가치와 성취를 일에서만 찾는 것. 그래서 내 모든 에너지와 시간을 일에 쏟아붓고, 내 삶엔 일밖에 없는 사람처럼 사는 것.
그런데 사실, 한 인간의 삶에는 일 말고 다른 중요한 것들도 많다. 가족, 친구, 취미,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
현대인에게 일이 인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 건 맞지만, '내가 곧 일'이고 '일이 곧 나'는 아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할 요소가 일 뿐일 리 없고, 일이 조금 잘못된다고 해서 내 인생 전체가 망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일은 일이고 나는 나다
너무나 당연한 이 명제를 나는 꽤 늦게 깨달았다. '좋아하는' 일이라서, 그것만이 내 삶의 목표이자 최대의 가치이며 자아실현을 위한 유일한 방법인 줄 알았다.
일은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 후부터, 나는 많이 자유로워졌다. 보상도 안 해주는 연차를 매번 다 쓰지도 않고 날렸었는데, 이제 어떻게든 다 쓴다. 가족 행사나 취미생활 때문에 며칠씩 연차를 붙여 쓸 때도 눈치를 덜 본다. 왜냐하면 일만큼 내 삶의 다른 부분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만큼 해야 할 땐 전력을 다 해 하고, 업무에 방해되지 않는 휴가 타이밍을 많이 고민한다.
업무시간외의 생활은 나 자신을 위해 쓰려고 애쓴다. 책도 읽고, 일 말고 인생 고민도 하고, 가족이나 친구들과 좀 더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퇴근하는 즉시 일 생각은 끝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물론 위에 열거한 몇 가지 마음먹기 이외에도, 일을 오래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요건은 무궁무진하다. 회사의 역량과 비전, 상사를 포함한 동료들과의 관계, 현실적인 조건과 대우 등등.
그저 이런 외부적인 조건들을 조정할 수 없다는 가정 하에, 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힘으로 힘든 순간들을 버텨냈는지를 요약한 것뿐이지만, 이 마음이 같은 처지(?)에 놓여있는 동지들에게도 유효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