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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의 걸작 Apr 12. 2024

한나 아렌트와 정체된 3월의 일기

D군과의 편지

흔히들 정치 성향을 구분할 때 자유를 우선시하느냐 평등을 우선시하느냐를 기준으로 삼고, 두 가치 모두가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큰 틀에서 정치에 관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힘들어 보여. 아무리 타당해 보이는 말이더라도 그것이 정치적 발언이라면 색안경을 쓰고 보게 돼. 단기적으로 정치에 있어서 중립적인, 객관적인 의견이 있을지 파악하기도 쉽지 않아. 이러한 문제는 정치를 공부하고자 할 때 더욱 두드러지는 것 같아. 공부를 위해 선택한 미디움 또한 다분히 정치적일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한나 아렌트는 좋은 교범이 되어 주어. 본인의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그의 의견은 상당히 믿을 만해. 카를 야스퍼스, 마르틴 하이데거 등과 학문적 교류를 나누었을 정도로 독일과 미국의 최고 가는 학자이거든. 뭐, 토마스 제퍼슨과 알렉산더 해밀턴의 정치 성향은 상반되지만 두 인물 모두 현시대에 존경을 받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한나 아렌트의 강점은 분석력이야. 당위 명제는 개인의 주관에 따라 동의하거나 그러지 않을 여지가 있을 수 있어. 하지만 당대 사람들의 시각을 초월하여 특정 정치적 사건(예를 들면 소련에 소속된 헝가리의 혁명에 대한 분석이나, 나치 독일에 대한 분석 말이야)에 대하여 보여주는 통찰이 인상적이야. 여러 지점들이 있었지만 전체주의를 분석하는 대목이 가장 인상적이었어. 아렌트는 전체주의와 (주로 군사적 수단을 동반하는) 독재를 분리해. 그는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극단을 모두 전체주의로 규정해. 전체주의의 핵심은 정치보다는 '운동'으로, 전체주의 정부는 정당의 고착화를 극도로 경계해. 한편, 전체주의 정부는 관료주의 정부나 군사 독재 정권이 최우선으로 요구하는 '명령'과 '명령에 대한 복종' 대신 '의지'라는 개념어를 전면에 내세우는데, 그렇기 때문에 전자가 말단 관료의 자의적인 판단을 제지하는 반면 전체주의 정권은 오히려 말단 관료의 자의적인 판단을 권장해. 네가 따라야 할 것은 지도자의 '의지'이기 때문에 네가 의지에 준하는 행동을 한다면 지도자 또한 그것을 긍정할 것이라는 생각이야. 한편, 전체주의 정권이 외부에서는 상당히 극단적인 작용으로 비춰질 수 있는데, 오히려 전체주의 정부는 의지에 반하는 인물을 적극적으로 억압하는 제도와 행정을 통해 공포를 조장하고, 이 공포가 운동 전개의 심화와 급진화를 막는다고 아렌트는 말해. 정말 놀라운 대목이지. 우리들은 대개 전체주의 정권은 테러 집단처럼 운동 전개의 심화와 과격화를 조장하며 운동의 동력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아니라는 거야. 이때 전체주의 정권이 채택하는 사회 계층의 양파 구조는 외부에서는 해당 정부가 비이성적인 광기를 제지하는 정상적인 정부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한편, 내부에서는 전체주의 정권의 의지에 탈선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동시에 외부 사회와 내집단을 비교하며 양자를 단순히 서로 다른 정치 형태일 뿐이라고 인식하게 해. 반발의 씨앗을 제거하는 거지.


그리고 이 글을 쓴 목적은, 상당한 감명을 받은 다음 단락을 소개하는 것이었어. 예술에 관한 단락인데 치밀하게 조직된 동시에 상당히 아름다운 문장이야.


문화는 대상과 관련이 있으며 세계의 현상이다. 그리고 쾌락은 사람과 관련이 있으며 생명 현상이다. 인간과 자연 사이에 설정된 음식 섭취의 신진대사에서 오는 쾌락만으로 삶이 더는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 삶은 세계의 대상들에 자유롭게 손을 뻗어 소유하고 소비할 수 있다. 이때 신진대사에서 나오는 쾌락은 인간의 활력이 이 순환 과정에서 더는 소진될 수 없기에 항상 분투와 노동을 수반한다. 그런 다음 생명은 소비에나 적합할 세계의 사물이나 문화적 대상들을 마련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요컨대 생명은 이들 대상이 인간의 신진대사와 통합되기에 앞서 준비되어야 할 자연의 대상인 듯 이들을 다룰 것이다. 자연의 대상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소비되어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또 인간이 살아가면서 노동하고 분투하며 회복하는 한, 그 자신은 자연적인 존재이므로 대상들은 끊임없이 새로워진다. 자연적인 존재의 생물학적 순환은 자연적인 모든 것이 작동하는 더 광범위한 순환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 자연의 존재가 아니라 세계의 존재인 한, 인간이 생산한 세계의 사물들은 자체로 새로워지지는 않는다. 생명이 세계의 사물들을 쾌락에 전용하고 소비할 때 이들은 그저 사라직 만다. 이러한 소멸은 노동과 소비를 번갈아 하는 방식을 기반으로 하는 대중 사회의 맥락에서 최초로 등장하며, 원래의 질감을 거의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교환 가치로 유통되다가 사회 내에서 닳아 없어지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문화를 삶의 방식 또는 인간 사유의 정점으로 바라보지 않고 향유의 '가치'가 있는 대상으로 바라볼 때, 문화는 소비의 대상이 되고, 소비는 소진을 동반하기에 빛바랜 문화는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이 아렌트의 생각이야. 그는 문화를 쾌락의 대상으로 바라볼 때 문화는 신진대사를 위해 소비되는 음식, 생필품과 동일한 수준으로 변모한다고 주장해. 문화가 정말로 인간을 고양하고 계도할 수 있다면 객관성(어느 시대에도 타당하거나 나름의 교훈을 주는 것이라고 문맥상 생각돼)이 확보되어야 하고, 이는 사유에 기반해야 해. 아렌트는 예술의 본질을 사유로 꼽으며, 전술한 내용 전반을 요악하였을 때 근대 미학의 전통을 계승해. 더불어 아렌트는 문화를 상품으로 변모시키는 주범은 '대중음악 작곡가'처럼 직접적으로 예술계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라 "많이 읽고 잘 아는 지적인 프롤레타리아 회원들"이라고 지적해. 이들은 특정 문화와 무관한 사람들도 이를 접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고 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야.


예술이 고고한 위치를 지키며 특정 사람들에게만 사랑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 과연 좋은 것일까?

사람들이 예술을 좋아하게끔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

그렇다면 문화를 훼손하지 않고 사람들이 어려운 예술을 부담 없이, 차근차근 배워 나가며 애정을 키워 나가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해보아야 할 지점이야. 다른 내용이지만, 얼마 전에는 이러한 생각도 했어. 현대 미디어는 숏폼 컨텐츠의 영향이 지배적이야. 동시에 온갖 요약 컨텐츠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지. 뉴스레터가 부상하며 유명 매거진들도 뉴스레터의 방식을 본받아 몇 장의 인스타그램 사진에 핵심적인 단어들을 큼직하게 배치해서 컨텐츠를 발행해. 뉴스레터는 가독성을 최우선으로 하며 친근한 어조와 쉬운 용어들, 간단한 문장 구조를 채택해. 이러한 상황에서 아름다운 문장이 설 자리가 어디 있을까? 1Billion이나 '감성 글귀'처럼 일상 매체의 맥락에서 완전히 박리된 그러한 방식이 아니라,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다양한 매체에서 숏폼 컨텐츠/요약 컨텐츠와 경합할 수 있는 방식으로서 말이야.


내 고민은 여기에서 시작되었어. 쉬운 말과 단순한 문장으로는, 사람들을 현혹하는 의문형의 인스타그램 컨텐츠로는 내가 사랑하는 문장을 보여줄 수 없겠다는 생각이었어. 그렇게 한다고 한들, 그렇게 하여 보여지는 문장이 책으로 읽었을 때보다 만족스러울까? 나는 책에 비하면 상당히 불만족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해. 인스타그램 컨텐츠에 '썰'을 빙자하여 진행하는 도서 마케팅을 보면 아무리 아름다운 글귀더라도, 아무리 공감이 되는 주제더라도 단 한 번도 그런 책을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아. 이 지점에서 아렌트가 제기하는 질문과 유사한 고민이 시작되는 거지. 고전 속 매혹적인 문장을 사람들에게 굳이 보여주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 이러한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소수의 사람들만 이것을 알고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보여주어야 할까? 현대 매체 논리와 어긋나지 않은 방식으로 말이야.


개인적으로는 텍스트의 특징은 비-즉각성이고 독자에 의해 해석되어야만 인식될 수 있다는 사실로 보여. 이 과정에서 저자의 의도와 독자의 개인적 상황에 근거한 해석 틀의 이격이 발생하고, 이 과정이 문학 작품의 의미를 풍부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해. 이유를 찾을 수는 없지만 사소해 보이는 한 단어가 미묘한 느낌을 주기도 해. 찝찝하다거나, 막막하다거나 하는 감정으로 말이야. 그래서 이러한 아우라를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따면 충분히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어 보여. 아 맞다! 이 고민은 윌리엄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 속 퀜틴 섹션에서 시작되었어. 퀜틴의 아버지 제이슨 3세가 그에게 할아버지의 시계를 물려주며 세상의 진리를 설교하는 장면이 핵심인데, 나는 이 대목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었어. 나만 알고 있기에는 너무 아름답고 가슴이 미어지는 장면이거든. 그런데 이 부분이 한 문단에 달하여 그대로는 보여줄 수 없고, 그렇다고 여느 때처럼 긴 줄글로 쓴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닿지는 못할 것이야.


커튼에 창틀 그림자가 보이니 일곱시에서 여덟시 사이일 것이며 시계 소리를 듣고 있는 나는 또다시 시간 안에 있는 것이다. 시계는 할아버지 것이었으며 아버지가 그것을 내게 주며 말하기를 내 너에게 모든 희망과 욕망의 능묘를 주니 네가 이것을 사용해 인간의 모든 경험이 결국은 부조리함을 알 것이며, 이는 네 개인적인 필요에 맞되 네 할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아버지에게 그랬던것보다 나을 바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드니 마음이 아프구나. 내 너에게 이것을 주는 건 시간을 기억하라 함이 아니라, 이따금 잠시라도 시간을 잊느라는 것이요, 시간을 정복하려고 인생전부를 들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정말 마지막으로, <소리와 분노>를 비롯해 내가 좋아하는 모더니즘 문학을 읽을 때면 뭔가 모르게 어려서 유망하던 인물의 몰락과, 그러한 인물이 과거의 특정 사건을 반복적으로 회상하는 이미지가 상상이 돼. 현실에서 어떠한 일을 경험하든 과거의 특정 사건을 떠올리면서 현재와 비교하거나, 현실을 망각하려고 하는 것처럼. 이러한 가슴아픈 정서가 너무 마음에 들었는데, 설명할 수는 없었어. 왜 모더니즘 문학이 이러한 정서를 공유하는지, 왜 모더니즘 작가들이 대체로 불우한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 그 와중에 이석영의 "포크너의 대위법적 주제 구현: <소음과 분노>"라는 논문을 읽었는데, 인상깊은 대목이 있어.


인생을 경험으로 측정하지 않고 시간으로 측정하면 모든 일들이 돌이킬 수 없는 일회성을 띄게 되고, 모든 행위는 피할 길 없는 운명적 결과를 초래하게 되며, 모든 경험은 무nothingness로 화해버린다. 따라서 인생을 시간으로 측정하는 사람은 비관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으며, 행위로 표현되는 경험을 통해 인생을 살기보다는 경험을 회피하고 추상적 언어의 유희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모더니즘 문학은 근대화의 극단으로 인해 수많은 실존적 문제가 제기되는 상황을 배경으로 하며, 같은 기간에 경제 대공황과 실업,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상황적으로나 시대정신 상으로나 파괴된 이상을 그리워하며 과거에 천착하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야. 확실한 것은 아무리 희망찬 미래를 그리거나 현실의 재건에 충실한 사람이더라도 과거와의 대조를 마음속에서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했을 것이야. 이러한 사고는 시간(과거)에 대한 집착으로 귀결되고, 상기 논문에 따르면 시간에 집착하는 한 인간은 정체될 뿐일 것이야. 이러한 생각에서 쓰인 글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인간을 노래하고, 이러한 글을 쓴 작자는 만족스럽지 못한 삶을 살았겠지.


작년 3월 입대 이후 나를 사로잡은 가장 큰 주제는 '시간'이었어. 의도하지 않고 읽은 책들도 시간에 대한 통찰을 전해 주었어. 시간에 관해 내게 영감을 준 책을 생각나는 것만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댈러웨이 부인>, <위대한 개츠비>, <연극과 그 이중>, <빈 공간>, <초현실주의 선언>, <비극>, <영향에 대한 불안>, <소리와 분노>. 이 논문은 나로 하여금 시간의문제와, 나를 둘러싼 실존적 공포를 직시하고 문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어. 이제는 새로운 주제를 찾아 떠날 시간이야.


매번 어떤 책이 좋다느니 하면서 메일을 보내는 것 같아서 때론 네 입장에서 귀찮을 것 같기도 해. 그럼에도 조금이라도 공감할 지점이 있거나, 생각을 해보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울 것이야. 나는 언제든 누군가의 개인적인 영감과 고민을 듣는 것이 좋으니, 혹시 하고픈 말이 있다면 주제와 상황을 고민하지 말고 아무렇게나 보내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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