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
분명한 것은 ‘치골이 정사각형의 중심점’이라는 것이고, 애매한 것은 치골과 배꼽 사이 간격을 특정할 때, ‘황금비 분할’을 따르면 ‘키의 1/8’ 이 되고, ‘10칸 분할’을 따르면 ‘정사각형의 1/10’ 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도면에서 보면, ‘8 : 8 분할’에서 ‘가로 3/8, 세로 4/8’에 ‘배꼽’을 둘지, 아니면 그 조금 아래 10개 칸의 ‘가로 4, 세로 5’의 위치에 둘지가 애매한 것입니다. 이 애매함은 ‘인체 원’이 ‘기하학 원’과 서로 크기가 달라서 있게 된 고민거리입니다.
그리고, 배꼽 위치를 특정하는 데 있어서,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은 ‘팔 길이’입니다. 비트루비안 맨의 손을 머리 정수리 높이로 벌려 올렸을 때, ‘손가락 끝과 배꼽까지의 길이’가 ‘인체 원의 반지름’이기 때문입니다. 팔 길이는 ‘8분의 3’이며, 그 팔을 내렸을 때는 손목이 치골 높이에 닿고, 손가락 끝은 허벅지의 중간쯤 닿습니다. 그 길이의 팔이 원을 그리면, 그 중심점은 ‘어깨 관절’에 있습니다.
그리고 기하학적으로는 ‘기존 정사각형’의 ‘3/8 높이’가 황금 비율에 맞으므로 그 위치에 배꼽을 두는 것이 4/10 위치에 두는 것보다 더 ‘황금비 원리’에 가깝고, 그 중심점으로 그려진 원은 정사각형 윗변의 양 꼭짓점을 두르게 됩니다. 균형이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체에서 양팔을 정수리 높이까지 벌렸을 때, 손가락 끝이 그 원의 둘레에 닿지 않습니다. ‘인체 비례와는 상관없는 원’인 것입니다.
결국, ‘비트루비안 맨’의 배꼽이 ‘황금 분할과 다른 위치’에 있다는 말이 되고, 그 보다 작은 원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다른 기하학적 근거가 있는 한 점을 찾으면, ‘10등분 정사각형’의 ‘가로 4, 세로 5 교차점’입니다. 이 경우는, 다행히 양손 끝이 ‘원의 둘레’에 닿게 됩니다. 그런데, 다 빈치의 디자인을 도면에 대입해 보면, ‘다 빈치가 그린 원’이 ‘그 원’ 보다 조금 더 큽니다. 때문에 비트루비안 맨의 중지 손가락 한 마디 정도가 잘립니다.
결과적으로, ‘비트루비안 맨의 배꼽’이 ‘황금비의 3/8’과 ‘단순 치수의 4/10’ 사이 애매한 어떤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 이틀이나 고민하면서 쉽게 결론 맺을만했던 것은 ‘다 빈치가 틀리게 그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내 마음이 듣는 소리는 ‘그럴 리가 있나?’였고, 결국 내가 분석을 못한 것이라 생각하고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봤습니다.
그러다가, ‘어깨 관절에서 손가락 끝까지, 8분의 3 길이’를 반지름으로 하는 ‘원’을 그려서, 어깨 관절에 있는 중심점 위치를 잡아보니, ‘그 원이 정사각형과 교차하는 지점’에 비트루비안 맨의 중지 손가락 끝이 알맞게 닿아 있었습니다. 결국은 황금비나 규격에 맞게 그려진 원이 아닌 다빈치의 애매한 원이 더 맞다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 원리를 몰라 다소 난감했지만, 다 빈치가 그린 ‘인체 원’의 제작 과정이 곧 보여서 금방 풀렸습니다.
실제 디자인에서는 ‘팔 길이의 작은 원’이 그려져 있지 않지만, 다 빈치는 그 원을 먼저 밑그림으로 그렸다는 것이고, ‘그 교차점과 배꼽 사이의 길이’를 반지름으로 해서 ‘원의 크기’를 결정한 것입니다. 또한 배꼽에서 발바닥까지의 길이 역시 그 반지름과 같고, 그에 해당하는 위치가 실제 비트루비안 맨의 배꼽 위치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황금 분할에 맞춰 배꼽의 위치를 잡은 것은 아니라, 황금 비율의 범위 안에 있지만, 그 ‘틀에 고정되지 않은 관찰’에 의해 최종 위치를 잡은 것입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다빈치는 ‘비트루비안 맨’ 디자인 과정에서 ‘원과 정사각형’의 ‘황금 비율과 분할’을 디자인했지만, ‘인체의 비례와 수치’에서는 ‘황금 비율’을 따르기보다 실제 모델을 ‘관찰’하는데 더 큰 무게를 둔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리고 필자가 그런 고민하게 된 이유는, ‘내 분석 과정’과 ‘다 빈치의 디자인 과정’이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다빈치가 실제 모델을 관찰하면서, 그 속에서 황금 비율이 있는 ‘원’과 ‘정사각형’의 겹침을 만들어 냈다면, 나는 그의 디자인을 분석하기 위해 그의 디자인에 ‘황금비 분할의 도면’을 대입해서 ‘분석으로 관찰을 판단하려 했다’는 것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즉 ‘디자인 과정과 분석 과정의 차이’에는 ‘‘창작과 활용’이라는 서로 다른 개념이 있다’는 결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1세기를 살았던 ‘비트루비우스[Vitruvius]가 건축가로서 ‘인체 비례’를 기하학적으로 연구했고, 무려 거의 1600년 이후, 그의 기록에서 영감을 받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더욱 완성도 있게 디자인한 것이 ‘비트루비안 맨’인데, 그 공통된 원리는 다름 아닌 ‘기하학’입니다.
어려서 어떤 친구 몇몇이 간혹 ‘미의 기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가장 아름다운 인체 비례’가 있다며, ‘8등신’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을 들려주었습니다. 머리가 굵어져서 보니 그 내용은 다름 아니라, 다 빈치의 ‘비트루비안 맨과 그 메모’에 담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말하는 친구들도 사실은 ‘들은 말만 따라 할 뿐 근본적인 원리는’ 알지 못했습니다. 기하학자나 수학자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은 ‘8등신’의 개념도 잘 몰랐고 그 출처도 몰랐지만, 사람들이 보는 ‘미의 기준’이란 것이 어떤 원리로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던 것입니다. TV에 나오는 미녀들의 얼굴을 면 분할하는 프로그램도 있었고, 인체 비율과 얼굴 비율을 살펴보는 프로그램도 간혹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근본 원리에 대한 프로그램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 근본은 미의 기준이 아니라, ‘만물 형상의 원리’에 있는 것이고, 그 전문분야가 기하학입니다. 그러나 기하학에서는, ‘미의 기준에 관한 언급’은 거의 없고, 또 미학이라는 분야는 기하학과 철학과 신학을 오가면서 난해한 논리를 늘어놓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인식되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한 가지 꼭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비트루비안 맨의 인체 비례’가 “미의 본질에 입각한 절대적-보편적 ‘미의 기준”은 분명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디자인의 모델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 본인이라는 것이 정설로 여겨지고 그에 대해 확실한 건 장담할 수 없지만, 다 빈치는 ‘절대적 미의 기준’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한 인체의 균형감 있는 비례’를 기하학적으로 연구한 것입니다. 혹시 ‘균형감 있다’는 표현이 미의 기준이 아닌가? 할 수도 있지만, 현실에서 비트루비안 맨의 비례와 많이 다르면서도 그 수려하고 아름다운 균형미를 가진 사람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꽉 막힌 사람은, 비트루비안 맨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떤 멋진 사람을 보면서 ‘8등신’이 아니기 때문에 아름답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8등신이 아니더라도, 인체나 얼굴의 비율이 비트루비안 맨과 다르더라도, 사람 인체라는 공통된 구조 속에는 무척이나 ‘다양한 비례와 균형의 원리’가 담겨있는 ‘아름다움의 결정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과하게 말하자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인체의 그 절대적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것인데, 그와 다를 바 없는 것은 ‘단 하나의 보편적 미의 기준’으로 다른 모든 ‘미의 다양성’을 판단하는 행위 역시 ‘본질적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악입니다.
거듭 말하자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재현하거나 생명에 있는 아름다움을 창작하는 것은 예술가의 본연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움을 규정하는 것은 사람의 이성입니다. 그러나 예술가가 만든 작품과 비교하거나 사람 이성이 만든 틀에 ‘아름다움의 다양성’을 가두는 것은 ‘미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있는 악입니다.
그래서, 분명 해지는 것 하나는, 본인만의 ‘미의 기준’을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 기준으로 자신의 인체의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고, 혹시 만족스럽지 못한 것은 건강한 방법으로 개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 기대되는 것은 삶의 활력과 건강도 얻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사실, 개인의 삶에서는 보편적 미의 기준은 거의 필요 없습니다. 그것을 대충 알면서 본인만의 개인적 기준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보편적이지 않은 자신만의 절대적 미의 기준이 있다면, 적어도 자기 짝을 비롯해 타인의 아름다움을 폄하하는 어리석음은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 외모가 못났다는 ‘평가를 받는 이’에게는 ‘자신만의 미의 기준을 가진다는 것’은 단지 허울뿐인 말장난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하학이나 미술에서 찾는 아름다움을 말하자면, 대중에게 인정받을 만한 절대적 아름다움은 단지 하나의 일면일 뿐이고, 광범위하게는 ‘아름다움의 다양성’과 짝이 되는 ‘유일성’을 찾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생명에 있는 아름다움’은 ‘이성으로 규정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외모가 좋건 나쁘건 본인만의 미의 기준을 가지고 자신을 관리하고, 또 타인의 미의 기준은 어떠한 지 살피다 보면, 작게는 비교나 열등의식에서 자유 할 수 있고, 크게는 창작의 모든 영역에서 풍성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