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만물은 겉과 속이 있습니다. 사람의 말과 소리는 귀로 듣지만 마음의 생각은 들을 수 없는 것 같이, 겉모습은 눈으로 보지만 속 구조는 볼 수 없습니다.
마음의 소리가 말로 드러나듯이 겉모습도 속의 구조에 의해 형상화됩니다.
사람 마음을 살피는 심리학, 철학이 난해한 것과 같이 해부학은 미묘한 차이가 크게 반영되고 조밀하고 복잡한 중첩 구조들이 많아서 가볍게는 공부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표정 없고 감정 없는 말을 듣고서는 그의 내면을 읽을 수 없듯이, 평면적으로 드러나는 겉모습과 변화와 현상만을 보면서 속의 상태를 파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인물화가 비중이 높은 미술에서는 필수 양식입니다. 그러나 전문 영역은 의학입니다.
미술가이면서 의사까지 될 필요야 없고, 해부학을 마스터한다고 해서 의사가 되는 것도 아니지만, 의사들이 정리하고 있는 해부학적 지식에 좀 더 깊이 접근하는 것은 필수인 것입니다.
학업 과정 돌아보기
어렸을 때 개구리 뱀 물고기 토끼를 잡아서 구워 먹곤 했습니다. 사냥한 것들은 칼로 가죽을 벗기고 배를 가르고 장기들을 분리하고 근육들을 덩어리별로 분해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사람의 몸속은 어떨지도 궁금했습니다.
사실 당시에는 미술, 의학, 해부학이 뭔지 알지도 못했지만, 미술가가 되기로 한 이상 자연스럽게 몸속 구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영역이 해부학이란 것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어쩌다 해부학 책이 손에 들어와서 보면 끔찍한 이미지들 때문에 오래 보고 있기도 힘들었지만, 더 큰 어려움은 입체적인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몇몇 작은 짐승의 근육들을 분해해 봤지만 사람의 인체보다는 너무 단순했고, 의학지식이 전무해서 부위별로 관찰하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중학생 시절에는 어느 정도 이해가 넓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평면적인 인식의 한계는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런 답답한 마음에 가졌던 습관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걸음과 포즈들을 보면서 뼈의 위치와 기계적 동세와 움직임, 그리고 [겉 근육 밖에 알지 못했지만] 근육들의 수축이완을 상상으로 그려보곤 했습니다. 당시에는 겉 근육만 알아도 충분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흙으로 근육들을 하나하나 만들어 붙여보고, 흙을 얇게 펴서 피부도 붙여 보면서 근육의 구조적인 특징들을 관찰했습니다. 입체적인 이해를 위해 그런 여러 수고들을 했지만, 도무지 보이지 않는 것이 입체적인 이해였습니다.
대학 시절, 해부학 교수님께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미 알고 있던 뼈와 근육들을 좀 더 상세하게 알게 된 것 말고는 당시 수업에서 유용하게 배운 것은 없습니다. 다만 중요하게 배운 것 하나는 첫 수업에 들은 것으로 ‘한 학기 수업만으로 작업에 필요한 만큼의 해부학 지식은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체 어디서 어떻게 공부해야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지 그 길도 찾지 못했고, 해부학 때문에 의대를 간다는 것도 불가한 일이어서 더 답답해지기만 했습니다.
물론 그럴듯하고 비슷하게 만들거나 그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평면적인 해부학 지식으로 입체와 운동을 작품화하는 것, 즉 생동감 있는 작품을 제작한다는 것은 불가능이었습니다. 상상만으로는 아무리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도 가진 지식과 직접적인 관찰 없이는 원하는 작품성을 만들어 낼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모델 수업에 자주 들어갔지만, 거의 모든 모델의 인체는 내가 관찰하고자 하는 생동감 있는 근육 형상이나 포즈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또한 평면적 기하학적 이상적으로 틀에 박혀 있던 인체의 균형 즉, 내 틀에 박힌 고정관념에 부합하는 인체는 단 한 명의 모델도 없었습니다.
어떤 이는 허리가 너무 길거나 짧고, 대체적으로는 팔다리가 내 관념보다는 너무 짧고 빈약하게 관찰되었습니다. 단 한 명의 남자 모델 빼고는 어느 누구도 인체 근육이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이도 없었습니다.
때문에 맘에 불평이 좀 많았는데, 그러나 돌아보면 당시의 인체에 관한 내 지식이 수준 이하였던 거였습니다.
사실, '이상적이지 않은 인체 균형 속에 있는 자연미를 찾아내도록 이끄는 것'이 해부학 공부인데, 당시 그 근본적 동기를 자각했더라면 좀 더 깊이 공부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즉, 이상형의 모델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얼굴과 인체에서 드러나는 자연미를 찾아내는 것이 내가 꿈꾸는 미술가의 궁극적인 지향점이었는데, 그것 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물론, 해부학과 관련 없는 미술장르에는 그런 지식까지 필요 없다고 필자 역시 떠밀리듯이 말하지만, 그러나 미술 이해를 기하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구상이나 비구상이나 모두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창작과정에서의 갈등
지금의 나이가 되도록 해부학 수업에 청강조차 해 보지 못했고, 다만 머릿속 상상 훈련만이라도 가능한 한 많이 했는데, 여전히 직접적인 관찰 없이는 원하는 완성도는 만들지 못합니다.
당시 간절히 원했던 것은, 사진이나 그림에서 드러나는 평면적인 묘사가 아니라, 모델 없이도 살아서 움직이는 뼈, 근육, 표피의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는 이해를 작품에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에는 도달하지 못했고 여전히 어렵기만 할 뿐입니다.
또한, 학업 과정에서 드러난 필자의 재능을 판단해 보면, 해부학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사실이나 현상에 대한 즉각적인 이해와 판단력 또한 너무 부족하다고 항상 느꼈습니다.
저녁노을이 붉게 빛나는데 그 빛의 광채는 어떻게 그려야 하며, 마음속의 기쁨과 분노, 사랑과 증오를 어떻게 작품화해야 할지, 감도 잡을 수 없는 스스로가 너무 어리석게만 느껴졌습니다.
표정변화에 있는 안면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을 관찰하면서도 그의 감정 상태를 읽는 것은 항상 어렵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런 나와는 달리, 대단한 재능을 보이는 미술사 속의 선배들이나 동시대의 천재들의 작품을 마주할 때면 나의 부족함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발견하곤 했는데, 그 또한 필수적인 공부였습니다. 그들의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자연미와 예술미의 깊은 이해는 항상 나를 자극했고 때론 비교의식으로 낙담하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럼에도, 모른다는 것을 자각할 때나, 이해력의 결핍을 경험하거나, 재능이 부족한 것을 실감하더라도, 그런 것이 필자에게는 아무런 제약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모르니까 알고 싶어서 갈등하는 것이고, 또 그런 마음의 갈증이 관찰을 더 깊이 하도록 이끌어 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경쟁심에 사로 잡혀 방황하는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은 항상 2등이라서 1등의 벽은 넘지 못한다고 토로했는데, 속으로 말하기를 '그런 생각이라면 넌 2등도 아닌 꼴등이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재능이 어느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허세를 부리고 있었는데, 속으로 말하기를 '얼마나 가진 게 없으면 허세까지 부리니?!'였습니다. 사실 그의 작품은 여기저기서 따온 이미지를 중구난방 콜라주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 마음이 되어 자신들이 질투하는 한 대상을 비난했습니다.
그래서 내 아들 딸만큼은 간절하게 이해하길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찾는 것은 남이 아닌 내 속에 있다'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남에게 있는 것이 내게 없다면 그에게 배울 수 있고, 내게 있는 것이 그에게 없다면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곧, 누군가 나를 질투하게 하는 이가 있다면 가능한 한 그와 친구가 되도록 권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시기 질투에 의한 경쟁은 친구가 될 수 없게 합니다. 그런 이들처럼, 많은 친구들이 자기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친구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흠을 잡고 비난하는 경우들을 많이 봤습니다.
시기 질투심은 사람의 감정이라 어쩔 수 없지만, 흠잡고 비난하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매장시키려는 시도는 자기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습관이 되면 미술가가 아닌 어리석은 정치꾼이 되어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허비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