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도 익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가끔은 글이 저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쓸 이야기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소재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커피 한 잔의 향기에도 이야기가 있고,
퇴근길 신호등 앞의 멈춤에도 글이 될 문장 하나쯤은 늘 숨어 있습니다.
문제는 ‘깊이’입니다.
무언가를 말하고는 싶은데, 그 말을 붙들 수 있는 내면의 단단함이나 생각의 깊이가 부족할 때, 글은 단정해지지 못하고 이내 흔들립니다.
얕은 지식, 조급한 표현, 충분히 익지 않은 감정들로 글을 서둘러 마무리한 날이면, “덜 익은 마음을 괜히 꺼내 놓았나…” 싶어 어딘가 미안하고, 자꾸만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쩐지 ‘장독대’가 떠오릅니다.
어릴 적 어머니는 메주를 말리고,
소금물을 부어 장독에 묻은 뒤 오랫동안 손도 대지 않고 기다리셨습니다.
된장도, 간장도, 고추장도 햇볕과 바람 속에서 천천히 제맛을 찾아갔습니다.
글도 그렇다는 것을
글을 꾸준히 써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문득 떠오른 좋은 문장 하나에 마음이 들떠 의욕적으로 글을 써 내려갑니다. 그러나 막상 다 쓰고 나면, 어딘지 모르게 맥이 빠지는 느낌이 듭니다.
말은 있었지만 말맛이 없고,
감정은 있었지만 방향이 없었던 글입니다.
그렇게 완성된 글을 다시 읽고 나면, 말이 아니라 설익은 생각만 늘어놓은 기분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글을 쓰면 일단 덮어둡니다.
마음속 ‘글의 장독대’에 그 글을 조용히 담가둡니다.
시간이 흐르고 글이 묵혀지면, 글은 달라집니다.
급했던 표현 사이에 여백이 생기고, 성급했던 단어는 조용히 다듬어집니다.
내 안의 급했던 생각도 천천히 가라앉고, 문장의 숨결은 한층 더 자연스러워집니다.
이제는 글을 고치는 사람이 아니라, ‘말을 아는 사람’이 되어 그 글을 다시 읽게 됩니다.
시간은 글을 덜어내기도 하고, 새로운 의미를 채워 넣기도 합니다.
며칠이 지나서야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왜 그 단어를 골랐는지 비로소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글쓰기는 단지 생각을 옮기는 일이 아니라,
내가 나를 듣는 과정이며, 생각의 장을 천천히 익혀 가는 일입니다.
오늘도 하나의 글을 썼지만, 지금 완성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장독대에 담긴 말들이 햇살을 더 먹고, 바람을 더 맞아 내 안의 미성숙함을 덜어낼 수 있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보려 합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사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저는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배우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