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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글 Aug 19. 2020

구겨짐 속에서 한 걸음 떼기

쿵 한걸음 걷기

 모의고사는 늘 1등이었는데 수능시험을 망쳐서 원하는 대학에 못 들어갔어요. 그렇게 오랫동안 사귀고 결혼까지 생각했던 그녀에게 뒤통수를 맞을 줄은 몰랐어요. 바람 피울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우리 가족 중 누군가 진짜 암에 걸릴 줄은 몰랐는데.    


나는 좀 다를 줄 알았는데    


 대체 어떤 사람이 대체 자신의 장래에 암담한 일이 일어날 거로 생각하기라도 했을까. 살다보면 삼류소설의 주제나 막장드라마 주인공에게나 일어날 법한 일들이 많다. 그 누구의 인생이라도 모아놓으면 책 한 권이 나온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내 삶의 주연은 나이고 나는 언제나 선의 편에 있기에,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악인에 대한 통쾌한 복수나 문제해결 후 결국 주인공의 삶에 빛이 들어온다는 결말을 맞을 거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현실의 우리들은 삶의 장애물을 뛰어넘기는커녕 부딪혀서 큰 외상을 입지만 않으면 다행인 경우가 허다했다. 지난하고 통속적인 일들이 나와 내 주변에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게 된다.    





 “지금 암 환자 등록했으니 5% 적용받으세요.” ‘왜 하나님은 이런 일을 주셨을까?’라는 질문이 생각났다. 원망하기보다는 서둘러 내가 잘못해서 한 일이 없는지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듣기 전과 후 나를 둘러싼 현실은 4시 1분에서 4시 2분으로 바뀌었을 뿐이고 시간은 물 흐르듯 계속 흘러갔다. 하지만 ‘아빠의 암’ 이야기를 듣기 전과 후로 내 인생의 시간은 양분화되었다. 빠지직하고 무언가 큰 금이 간 느낌이었다.    


 그전까지 아빠가 가슴 아래쪽 부분이 아프다고 처음 말했을 때, 그런 일은 60대 아버지들이 대부분 한 번씩 경험하는 일이라고 가볍게만 생각했었다. 큰 아픔이 아니었기에 아빠 본인 조차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빠는 엄살이 있어서 조금만 아프면 병원에 가는 스타일이었고 평생 큰 병치레를 하지 않았던 아빠가 한 번에 그렇게 큰 병에 걸려올 줄은 아무도 몰랐다.    


 퇴직 후 아빠가 매일매일 소소하게 집에서 아침에 커피 마시고, 신문 보고, 아빠가 하고 싶은 책을 읽는 모습이 병원 생활로 인해 사라졌다. 특히 얼마 전에는 수자원 공사에 정년이 없는 일자리에 소소한 일거리로 재취업해서 신나던 아빠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내가 계획한 일들과 생각했던 일들은 모두 이루어져야 하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그게 바로 오류이다. 생각해보니 인생에서 예상하지 못한 일은 늘 많다. 새삼스럽게 실패했다고 우울할 일이 아니었다. 인생이란 허다한 예상 바깥의 실패들로 점철되어있었고, 수많은 실패 중 몇몇 작은 성공들이 모여서 지금의 나를 만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성공의 결과 또한 나는 예상할 수 없는 미약한 존재였다. 알고 보면 내 손에서 벗어난 것이 훨씬 많은 것이 인생이다.        




삶이란 존재하는 것    


 ‘아니 그러면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나?’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결국에 내 손에서 벗어난 것들 뿐인 게 바로 인생이라면 왜 그렇게 바둥바둥 살아야 하는 거냐는 원론적인 질문에 도달한다.  

  

한 걸음 내미는 인생    


 우리의 삶은 ‘어떤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이기 때문이다. 존재로서만으로 기쁨과 감사가 가득한 삶을 누려야 한다. 설령 기쁨과 감사까지는 못되더라도, 내 삶에서 누추하고 후미지고 냄새나는 것들까지 모두 끌어안고 한걸음 다시 내미는 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면 모두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뼈저리게 인지하고 있다. 그리고 인생을 즐겁게 살아가려는 모든 이들은 잡동사니 같은 이 모든 것들을 끌어안고 한 걸음 더 내디딘다. 주저앉아 있을 때, 무겁디무거운 발자국을 떼서 쿵 하고 한걸음 옮겨놓으려 애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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