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를 생활로 되가져 오는 길
가능할 것 같지 않던 날씨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아침에 반짝 소나기가 쏟아지더니 오후에는 한 바가지 빗줄기가 내리붓는다. 설마 비가 올까 하는 생각에 우산을 챙기는 일을 무시했다. 이렇게 까지 마구 쏟아져 내리면 어디 피할 방법이 없다. 비를 맞을 수밖에 없다.
비를 맞는 일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다. 오래된 구옥에서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감상하는 일은 흔히 맛보기 힘든 행운이다. 그 행운은 최소한 2가지 조건이 맞아야 가능하다.
우선 비가 오는 시점이나 상황이 늦은 오후여야 제격이다. 단순히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아니라 스콜처럼 소나기가 쏟아져야 한다. 다른 한 가지는 그 시간에 한옥 안에 있어야 한다. 한옥에서 마당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장소여야 한다. 제주에 그런 곳이 있을까. 원도심에 그런 곳이 있다. 오늘 그런 조건이 맞았다. 비가 쏟아지는 시간에 향사당 안에서 마당을 쳐다보는 행운을 얻었다.
오래된 구옥에서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감상하는 일은 흔히 맛보기 힘든 행운이다
어제까지 뙤약볕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던 것 같던 제주의 날씨. 정상적인 날씨를 되찾은 것일까.
제주의 도심에는 공교롭게도 녹지가 적다. 한라산과 중산간 덕분에 녹지비율이 높아 보이기는 하지만 도심 한복판에는 나무를 찾아보기 힘들다. 도대체 삭막한 주택들 외에 제주의 도심에는 쉴만한 공간이 있기나 한 것일까. 제주사람들은 나무에 대해 너무나 인색한 것이 아닐까. 조금만 나가면 숲이 있다는 이유를 들겠지만 그 어떤 이유로든 도심에서 한적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제주는 참으로 인색하다는 결론이다.
원도심의 삼도2동 주민센터 건너편에는 오래된 전통 한옥 한 채가 있다. 관덕정이나 제주목관아처럼 예전 관료들의 행정 사무실도 아니고 향교 같은 곳도 아닌데 원도심의 가장 핫한 문화공간들이 모인 곳에 향사당이라는 오랜 한옥 건물이 있다.
원도심 길을 걷거나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은 이 집을 지나면서 늘 닫혀있는 철문과 돌담 너머로 여긴 뭔가 하며 목을 쑥 뽑고는 기웃거리기 일쑤다. 그도 그럴 것이 건물에 대한 설명이 건물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쪽에 세워져 있다. 근데 입구가 닫혀 있으니 뭐 하는 곳인지 알 방법이 없다. 나 역시 이곳을 여러 번 둘러본 적이 있지만 뭐하는 곳인 줄은 몰랐다.
그래서 그 설명을 잠시 옮겨본다.
향사당(鄕社堂)
향사당은 고을의 어른들이 봄. 가을 2회의 모임을 가지고 활쏘기와 잔치를 베풀며 당면과제나 민심의 동향에 대해 논하던 곳이다. 향사당은 애초에 가락천 서쪽에 지었던 것을 1691년(숙종 17) 당시 판관 김동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짓고, 1797년(정조 21) 방어사 유사모는 그 이름을 향사당이라 고쳐 불렀다. 이 건물은 조선 초기에 좌수의 처소로 쓰이다가 1909년 이후 신성여학교 교지로 이용되었다. 이 건물은 1981년 다시 지었는데 이때 길가에 붙어있어 동남향이던 길 방향을 동북향으로 바꾸었다.
향사당은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6호다. 문화재 보존을 신경 쓰다 보니 일반인들이 막 사용하는데 제약이 따른다. 가끔 행사가 잡히면 일반인들에게 열리는데 그 시간이 공교롭게도 일정치 않다.
오래된 건물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놔두면 더 쉽게 무너지고 쇠락한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향사당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늘 상 잠겨 있다가 어쩌다 행사 때면 열리다 보니 도무지 사람들이 생활했던 건물로 여겨지지가 않는다. 그런 건물을 최근에 다시 열었다.
원도심 길을 걷거나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은 이 집을 지나면서 늘 닫혀있는 철문과 돌담 너머로 여긴 뭔가 하며 목을 쑥 뽑고는 기웃거리기 일쑤다
일단 민간기구가 수시로 사용을 하도록 한시적이지만 사용허가를 받았다. 그 이후 제주 관련 영화를 만들고 있는 오멸 감독의 영화를 이곳에서 상영한 적이 있다. 많지 않은 사람들이 참석했지만 이구동성으로 향사당이 좋다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고풍스러운 옛 건물에서 편하게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게 아마도 낯설면서도 신기하고 그러면서도 고풍스러운 맛이 좋은 것이 아닐까 싶다.
비가 내리는 금요일 오후. 한참을 비 오는 바깥을 다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중년의 여인과 남자분이 찾아들어온다. 다른 관계자를 아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향사당이 열려있는 것을 보고는 찾아온 것이겠거니 생각하고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일주일여간 낮에 향사당을 열어놓으니 사람들이 좋던 싫던 여러 이유로 이곳을 찾는다. 문화재가 생활로 돌아가고 있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다른 사람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더니 향사당 사용에 대한 문의를 한다. 나를 향사당 관리인으로 여긴다. 한편으로는 단순한 시설 관리원 쯤으로 여기는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지만 그 사람 입장에서 보면 마루에 서류를 잔뜩 펼쳐놓고 제집인양 쭈그리고 앉아 일을 하고 있으니 향사당 관계자로 여기는 것은 당연하지 싶다.
그중 한 여성은 오멸 감독의 영화 상영회에 참석하고는 향사당이 너무 좋아 자신들이 기획하고 있는 문화교육행사를 이곳에서 열고 싶어서 논의하러 찾아왔단다. 지난번의 행사가 열매를 맺으며 새끼를 친 셈이다. 언제가 될지 구체적인 이야기는 나누어야 하겠지만 일주일여간 낮에 향사당을 열어놓으니 사람들이 좋던 싫던 여러 이유로 이곳을 찾는다. 문화재가 생활로 돌아가고 있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크지도 넓지도 않고 복잡하지도 않은 채 달랑 구옥 한 채만이 놓여있는 게 다다. 그런데 문화재라는 이름하에 원도심의 중요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주민들과 관광객들에게 잊혀가고 있다. 문화재는 잊히자고 닫아놓는 것이 아니라 현대적으로 되살려 주민들의 품으로 되돌려야 할 것들이 있다. 향사당은 그런 류의 문화재다. 사람들이 기분 좋게 휴식공간으로 찾아들어야 제 역할을 다하는 건물이고 원래의 건축 의도이기도 하다.
원도심에서 새로운 포스트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곳이 하나 더 생길 수 있을 것 같다. 혹시 지나다 문이 열렸거든 주저 말고 쓱~ 들어가서 의자에 앉아 쉬었다 가시라. 제주 도심에서 이런 곳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원도심에서는 특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