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담긴 공간을 서성이는 아침

푸르름이 가끔은 과거를 이어주는 매개가 된다.

by 너구리

도심에서의 생활은 언제나 계절에 대해 뒷북을 치기 마련이다. 무언가 계절이 바뀌었음을 느끼고 한참을 지내다 보면 다른 시간대인 다른 세상의 한켠에서 허둥대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찌뿌듯한 날씨와 화창함을 겨루는 어정쩡한 날이다. 흥얼거림이 입에서 저절로 나오는 묘한 느낌의 오전. 지인과 전화 통화를 위해 일반 주택을 리모델링한 사무실 밖에 나와 주변을 서성인다.


매일같이 보는 일상의 흔적이 덧없음으로 쉽게 연결시키는 인과성을 넘어 다른 모습으로 눈길을 끈다. 흔치 않은 순간이다.


저 벽에 붙어있는 넝쿨들이 새삼스럽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흔한 담쟁이넝쿨과 다른 녀석이 곳곳에서 세력을 넓히는 중이다. 실타래처럼 생긴 꽃을 피운다. 육지에서는 잘 보지 못했던 꽃이다. 어쩌면 한 번도 주목하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하눌타리. 제주에서 그리 부르는데 실제 꽃 이름이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물어보니 나중에 꽃 한가운데에 열매가 맺힌단다. 그 열매가 맺힌 꽃을 집안에 걸어두면 액막이 기능이 있다는 이야기도 함께 들린다. 역시 사람은 사는 만큼 아는 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대문과 담에 붙은 담쟁이 사이로 포도가 싱그럽게 매달렸다. 지나는 사람마다 눈독 들이는 열매다. 이 녀석이 짙은 포도색으로 변하게 되면 많은 행인들이 한 개 두 개식 따먹기 좋은 열매다.

사람은 사는 만큼 아는 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몇몇 분들은 포도 따먹는 게 부담스러운지 이거 먹어도 되냐고 들어와서 물어보시는 분들도 계신다. 도심에서 포도를 따먹는 일이란 어린 시절 담벼락에 붙어 피던 장미와 온 갖가지 꽃을 보던 기억과 그리고 옆집의 대추나무, 감나무 등 다양한 열매를 옥상이나 대문 위로 올라가서 따먹던 시절의 추억을 연상시키다. 그러고 보니 그런 시절을 잊고 참으로 팍팍하게 살았다. 그러는 사이에 늙어갔다.


대문이나 담벼락에 붙은 포도열매를 바라보는 게 더 이상하게 느껴지는 시절이다. 이게 발전은 아닌데... 어쩌면 공상과학영화의 음울한 미래에 나도 모르게 적응해 가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정상이 비정상으로 바뀌는 한가운데서 그 치환을 느끼지도 못한 채 살아가는 모습을 과연 잘 살아간다고 할 수 있으려나...

담벼락을 온통 뒤덮은 담쟁이를 보며 옛적 학교 혹은 고성을 생각한다. 담쟁이는 시간을 잎과 줄기에 묻고 뻗쳐간다. 시간이 머무는 식물이다. 그 식물이 내가 일하는 이 주택의 한켠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시간이 아직은 우리 편이라는 말이 아닐까. 그 시간의 덫에서 언젠가 벗어나겠지만 아직은 그 시간이 내편이라는 사실에 안도할 수 있다.


하눌타리와 포도 그리고 담쟁이가 엉켜있는 담장. 오래된 집에서나 가능한 모습이다. 특히 하눌타리의 모습은 사뭇 정겹다. 지금 막 파마를 마친 나이 든 중년 여성의 물기가 남은 머리카락을 연상시키는 모습. 그러나 검은색이 아니기에 참으로 다행이다.


지붕에서 내려온 앙상한 가지가 눈길을 잡았다. 담쟁이인가? 아니어도 좋고 남들은 다 푸르른데 저 혼자 갈색으로 메말라 가는 심정을 생각해보니 갑자기 이 줄기가 가슴에 와 닿는다. 나도 저렇게 나이 들어가고 있는데. 인생사 별거 있나? 세간의 흔한 이 말이 왜 이리 진실에 가깝게 느껴지는지... 이상한 오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