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구리 Oct 15. 2017

너구리 제주를 걷다 2_금빛 모래와 모슬포 가는 길

올레 9코스_2014년 10월 11일

오늘은 화순항의 금빛 모래 해변부터 시작할 터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려 했는데 아무래도 토요일 오전은 몸의 긴장이 풀어지는 느낌이다. 오전 10시 전에는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은 욕구가 있지만 한 주간의 피로를 풀고 싶어 하는 육신은 한 시간이라도 좀 더 많은 휴식을 달라고 졸라댄다.

지난주에 이미 눈에 익은 안덕면 농협 앞에서 나를 비롯해  몇몇이 함께 버스를 내린다. 각자 하루의 일정이 있겠지만  해변으로 향하는 2명이 배낭을 메고 있다. 혹시 저들도 올레 길을 나서려나 했으나 하루 종일 그들을 본 적은 없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도중 중간에 나이 든 많은 중년의 아저씨들 예닐곱 명이 기다렸다는 듯 다 함께 버스를 내린다. 여기에 뭐가 있지 보니 사람들 손에 커다란 신문류의 종이가 들려있다. 제주 경마공원이다. 서울이나 제주마 경마의 붐은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다. 정보지를 손에 움켜쥐고는 모두 한 군데로 향하고 있다. 순간 웃음이 나온다.


지난주 도착지로 삼은  화순항과 금빛모래 해변을 향했다. 내려가는 길 멀리 방파제가  '내가 항구다'라고 말한다. "그래 니기 무얼 가지고 있는지 보자"  금빛모래 해변은 왜 그런 이름을 갖고 있는지 충분히 증명해 주고 있다. 모래가 이토록 곱다니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좋은 해변이다. 금모래라는 이름이 참 잘 걸맞는다.


이쁜 외국아가씨 한 명이 해변에 수건 한 장을 깔고 태양빛을 온몸으로 받고 있다. 서양 여성들은 햇볕에 민감한 듯싶다. 그리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게 장점이기도 하지만 낯섦은 아직까지 어쩔 수가 없다. 


언덕을 넘어 발걸음을 옮긴다. 이것도 작은 오름이라고 한다. 제주도는 모든 언덕을 오르면 다 오름이다. 참 신기한 구조다. 그냥 동산이나 구릉이 아니다. 물론 그 이름까지 기억할 상황은 아니지만 제주도가 화산섬이라는 점을 깜빡했다. 먼 옛날 이 땅은 크고 작은 다양한 화산이 온 섬을 덮었으리라. 


첫 번째 오픈을 넘고 나니 해변이 계속 연이어 이어간다. 멀리 보이는 송악산까지 계속 이 길을 갈터이다. 멋진 풍광이다. 더위를 느끼며 제주시에서부터 입던 잠바를 벗었다. 어제 갑자기 구매한 셀카봉이 오늘은 여러 가지 내 사진을 찍어줄 기회를 줄 것이다.

높지 않은 오름을 넘어가며 올망졸망 이어져 가는 올레길이 정겨운 느낌을 준다. 중간중간 길에서 보이는 바다는 자신만의 독특한 모습을 내비치고 있다. 그래서 이 바닷길은 7코스나 8코스의 해안길과는 다른 묘한 매력을 품고 있다.

 

길을 걷다 무심코 뒤를 돌아본 사이 멀리 한라산이 구름에 포위되어 있다 못해 구름이 산을 넘어 남에서 북으로 길게 늘어져 가고 있다. 구름이 길을 가다 한라산에서 쉬어가는 느낌이다. 남에서 지펴놓은 아궁이의 연기가 솔솔솔 넘어가며 북으로 북으로 길을 가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순간순간 많은 그림이 눈에 잘 들어온다. 마음이 조금은 편해져서인가 제주의 바다가 좀 더 마음속으로 다가섰다.


뒤이어 상황이 변해간다. 심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바다가 요동치고 파도가 제 목소리를 내며 자신만의 독특한 목소리와 모습을 해안가에 드러내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출렁이면 저쪽은 흰 거품을 내고 저쪽은 높은 파도로 덤벼온다. 방파제에 부딪치는 파도는 훌쩍 경계를 넘어 도로로 넘실댄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것이다. 아무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는 일이다

바람이 오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바람이 부는 것이 아니다. 바람이 제주다.

바람이 불 때 시인 김수영은 풀이 먼저 눕는다고 했던가. 


그 바람이 불기 전에 풀은 바람과 함께 있고 눞던지 일어서든지 그들은 관여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그 바람이 제주를 만들고 초원을 만들고 있었다. 사람이 바람에 날아갈 수 도 있겠구나는 생각이 든다.. 여러 해안을 지나고 바람 속에 있는 길을 무심결에 걷는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것이다. 아무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는 일이다.


멀리 뒤편으로 지나온 길들이 눈에 들어온다. 거센 파도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태풍 봉퐁의 영향이라 그런가 그칠 기미가 없다. 그 길을 가다 산방산에 들어섰다. 산에 동굴이 있어 산방산이라 했다는데 그 의미를 잘 모르겠다. 바람과 태풍으로 해안 풍경을 감상할 기회를 잃었다.

황당한 지형에 낯선 바위산과 목초 그리고 생활패턴이 전혀 다른 동양 오지의 사람들. 내가 그들이었다면 패닉으로 아무 일도 못했으리라

아래 배가 보인다.  하멜상선이다. 하멜이 표류한 곳이 이곳이로구나. 그래도 말로만 듣던 하멜의 표류 현장을 둘러보며 배안과 주변을 둘러본다. 표류한 하멜 일행들은 참으로 난감했으리라. 황당한 지형에 낯선 바위산과 목초 그리고 생활패턴이 전혀 다른 동양 오지의 사람들. 내가 그들이었다면 패닉으로 아무 일도 못했으리라. 이미 제주를 알고 있는 육지의 인간들도 제주에 내려오면 많은 부분에서 감동하거나 놀라는 게 예삿일인데 그들은 어떠했으랴.


암튼 10여 년이 넘게 살다, 탈출도 시도하고 감옥에도 갇히고 등등을 했을 터이고 그 기록을 남겼으니 참 좋은 역사적 기록이자 경험이다. 계속되는 해변과 해안들이 너무나 인상적이지만 역시 사람의 기억과 느낌만으로는 표현할 길이 없다. 제주에 와서 길을 걸으며 놀라움보다는 좋다는 느낌이 제대로 들기 시작했다. 아... 이래서 길을 걷는 것인가.

걷는 도중 파도가 요동치며 나를 향해 달려왔다. 사실은 나라는 존재를 안중에 두지도 않은 채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중 나를 향해 달려든다는 느낌은 내 억지에 불과함을 잘 안다. 잠수함 선착장은 폐쇄됐고 마라도 가는 배편도 끊겼다. 온몸을 날려버릴 바람이 송악산을 한 바퀴 돌아오라는 올레의 신호에 의구심을 자아냈다.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그 기우는 막상 그곳에 가지 않았다면 아주 큰 후회를 할 뻔한 망설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참으로 멋진 산이다. 추후 편한 시간에 다시 방문하고픈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움푹 파인 내부에 주변을 둘러싼 깎아지는 절벽과 멀리 보이는 가파도와 마라도의 바다 풍경은 그 어떤 것보다도 좋은 감동을 자아낸다. 바다를 건너 보이는 지나온 산방산과 뒤편의 한라산 모습을 보며 참 다양한 걸 아무렇지도 않게 보여주는 제주의 자연이 조금은 얄미운 생각이 든다. '내가 가진 게 이 정도인데 니들이 보고 싶으면 보고 느끼고 싶으면 느껴봐. 단지 약간을 노출할 뿐이야...'

바다를 건너 보이는 지나온 산방산과 뒤편의 한라산 모습을 보며 참 다양한 걸 아무렇지도 않게 보여주는 제주의 자연이 조금은 얄미운 생각이 든다

아주 이쁜 여인네가 어깨를 살짝 드러낸 기분이랄까. 얄미운 구석이다. 그 와중에 약간의 앙탈이랄 바람을 보냈다. 짙은 보라색이나 자주색이 칠해진 한껏 길러진 손톱을 드러낸 모습니다. 밉지 않다. 송악산을 일주하며 예전의 사람들은 여기에 와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싶다. 섬의 끝을 이같이 만들어놓은 자연의 신비에 경의를 표했을까 아니며 풀밭을 즐기는 여유에 마냥 기뻐했을까. 대장금의 제주도 장면을 여기서 촬영했다 하니 충분히 이해되는 마음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깎아지른 절벽과 바위 그리고 목초 간간히 뛰어노는 말들이 이 화산의 조그만 끝자락을 충분히 의미 있게 하고 있다. 멀리 보이는 마라도와 가파도의 느낌도. 저 섬을 넘어가면 그곳은 망망대해 더 이상 갈 곳이 없으리니.


이어도 말고 무엇이 그들에게 남아있었을까. 옛적 뱃사공들은 파도가 치면 배안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물론 요즘도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산방산과 알뜨르 비행장에 산재해 있는 격납고

돌아 나와 모슬포를 향한다. 목초지를 지나 또 다른 오름으로 향했다.  이 오름은 섯알 오름이라고 한다. 4.3 유적지라 했다. 양민학살의 현장이라고 했고 추모비가 있는 곳이다.  너무나 안타까운 사건인지라 가슴이 아프다. 밭이 나왔다. 모슬포가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해안이 이어지는데 지쳐서 긴 기억이 남지 않는다.

모슬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상업적인 느낌이라 그런지 그냥 모슬포라는 이름만 남기고 싶어 진다. 어쩌면 내가 너무 감상적인 기대를 했을지도 모른다.


뒤돌아가서 카페에 앉아 차 한잔을 마시고 싶은 심정이지만 여기서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버스 시간표를 확인하고 버스에 올랐다. 저녁이다. 졸음이 엄습하면서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아주 도시적인 햄버거 생각이 난다. 내리면 맥도널드에 가야겠다. 왜 햄버거 생각이 나는 걸까. 웃음이 나온다. 그렇게 버스에 앉아 졸면서 제주시로 향한다.


그래도 멀리서 보이는 모슬포의 등대는 낭만적 느낌을 만들기에 충분하다. 등대는 그 이름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감상적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인가. 오늘  걷기는 지난주보다 조금은 더 가슴으로 걸은 느낌이 든다. 다음을 기약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망설임으로 시작한 올레 8코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