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타 분야 혹은 이종간의 결합이 대세다. 융합이라는 단어가 일반적이자 당연한 미래인 듯 이야기한다. 행정에서도 융합이라는 단어와 더불어 협치라는 용어는 트렌드에 가깝다. 부서간 칸막이가 높아 일의 진척이 힘든 상황에서 주민들과 협력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내고자 하니 꽤나 바람직한 일이다.
공교롭게도 그 바람직한 용어들이 일상화되고 몇몇 단어들은 구시대의 유물처럼 시들해진 느낌마저 든다. 용어가 껍데기만 사용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적절할지 모르겠으나 얼마 전까지 유행병처럼 사용하던 글로컬(글로벌과 로컬의 결합)이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사용빈도가 확 줄어 더 이상 선진적이라기보다는 ‘아직도?’라는 느낌을 전해준다. 첨단의 느낌이 사라져 버린 때문이리라. 세계화 속에서 지역의 역할과 주체성을 강조하는데 매우 유용해 거의 유행어처럼 사용했던 기억이 새롭다.
6차산업화라는 단어에도 생각이 미쳤다. 1차, 2차, 3차 산업을 복합적으로 결합해 높은 부가가치를 발생시키는 산업이라는 의미로 6차 산업이라고 사용한다. 각 산업을 결합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면 좋은 일이다. 주로 예술적인 측면에서 사용되지만 콜라보레이션이라는 용어 역시 자주 언급된다.
분야는 다르지만 대부분 이질적인 분야의 협업을 전제하기에 가능한 일들이다. 그 개념이 근사한 덕인지 이같은 개념들이 너무 단순하고 기계적으로 사용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개념들을 사용함에 있어 과정에 포함되고 맞닥뜨려야 할 구체적이고 치밀한 현실을 멀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
농사를 짓는 일도 모자라 가공품을 만드는 제조공정을 도입하고 서비스산업으로 확대하는 일까지 하라니 과하다는 생각이다. 지역적인 것을 무조건 강조한다고 세계적인 것이 될 리가 만무한데 지방우선주의가 세계적인 것으로 둔갑되는 느낌. 다른 종류의 것이 하나로 합해지는 융합에는 여전히 분야마다 융합보다는 샐러드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해본다.
공교롭게도 북미정상회담을 보며 평화라는 단어보다 이 같은 단어들이 먼저 떠올랐다. 두 정상의 만남을 보며 하이브리드라는 단어가 떠올랐고 대척점에 있는 양 정상이 가운데로 걸어와 악수를 하는 장면을 보며 감동과 함께 언뜻 기계적 절충주의의 산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심의 행렬이 길어지는 상상의 나래를 다잡으며 생각을 되돌린다. 세기의 정상회담이 쇼처럼 보이게 하기위해 양측은 뒤편에서 얼마나 많은 협상과 노력을 들였을까. 양국정상이 만나기 전날 밤까지 3차례의 실무협의가 이뤄졌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양국 정상의 악수 이면에 숨겨진 치열한 논의와 협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이해 당사자들간의 대립과 판을 깨겠다는 선언도 포함해서.
알고 있는 단어들을 합친다고 새로운 개념이 나타나거나 사회가 새 단계로 도약하지 않는다. 역할을 맡은 행위자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상상을 해보며 주변을 돌아본다.
선거가 끝났고 산적한 문제들이 당선자들의 외침을 대신해 이슈의 공간을 채울 시간이다. 수많은 공약과 함께 제2공항, 쓰레기, 대중교통, 난개발, 오버투어리즘 등 여전히 많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눈앞에 내 던져졌다.
기존의 단어들을 반복한다고 해결될 일들이 아님을 알고 있다. 습관처럼 사용하는 협치나 융합, 글로컬이니 하는 단어들이 조금은 더 신중하게 사용됐으면 한다. 언어의 유희를 위한 멋스러운 나열이 아니라 안에 담겨있는 제대로 된 의미를 이해하고 산적한 문제들을 푸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중앙정치와 국제정치의 파고에 모든 관심이 묻히고 있다. 어쩌면 묻히게끔 놔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트렌디한 용어를 유행어처럼 쓰는 대신 현실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 다른 시작의 시간이다.
이재근/제주도 도시재생지원센터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