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아트플랫폼을 찾아 기억을 되살리다
고향이 주는 기억은 아스라함과 안타까움 혹은 그리움이 뒤섞이기 마련이다. 나에게 인천의 옛 항구 주변은 역사적 흔적이 혼돈처럼 뒤섞이듯 복합적 감정이 마구 엉켜있는 느낌을 준다. 어린 시절 아무것도 모르고 놀던 기억과 발달된 도시로의 탈출을 꿈꾸던 지역, 그리고 시간이 정체되고 쇠락해가는 도심의 중심지와 자꾸자꾸 시계를 되돌리는 기억 등 복합적 감정의 실체가 모여 다소 비현실적인 모습을 머릿속으로 재창조하곤 한다. 그러나 오랜만에 현장을 찾아 실체를 봤을 때 그 인위적 구성이 얼마나 현실과 다르며 깨지기 쉬운 모습인지 알아채곤 허탈해하기도 한다.
주말 오후 제주서 급하게 올라와 인천과 김포를 들러 일을 보러 인천을 향해 내달린다. 일이래야 아버님을 만나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마음을 내야 하는 일인지라 시간내기가 쉽지 않다. 괜히 어린 시절 내가 놀던 장소들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한 마음이 든다. 인천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지금은 한복판일리 없지만) 자유공원이나 화교 거리 그리고 짜장면의 발원지라 일컬어지는 식당가 가득한 지역들을 지나가 보기로 한다. 최종 목적지는 이곳이 아닌 일본의 적산가옥이 즐비하던 지역의 거리. 여간해서는 잘 찾게 되질 않는 약간은 다른 지역에 속한다.
오랜만에 현장을 찾아 실체를 봤을 때 그 인위적 구성이 얼마나 현실과 다르며 깨지기 쉬운 모습인지 알아채곤 허탈해하기도 한다
어느 큰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중구라는 지명을 가진 장소는 옛 영화를 가지고 있으나 오늘날에는 쇠락한 구력이 느껴지는 장소이기 마련이다. 인천에서도 그 현상이 예외는 아닌 듯싶다. 중구청이 그 거리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으니 말이다
중구청 앞 좌우로 펼쳐진 거리는 근대문화유산을 가득 품고 일본식 거리가 재현되어 있다. 어린 시절 이곳은 적산가옥들이 가득 차 있으나 쇠락함이 가득해 을씬년스러웠던 기억만이 가득하고 사람들도 잘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다지 자주 찾지도 않았고 반갑지 않았던 거리였던 기억이 남아있다. 개항이후 근대의 상업 중심지이자 항구와 관련된 지역이었을테니 어린이였던 나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졌을리는 만무하다.
지금은 옛 기억들을 되살리려 함인지 나름 일방통행과 다양한 형태의 가게들이 즐비한 게 도시재생 혹은 지역 활성화의 많은 노력들이 결과물로 나타나 있다. 이곳에 사람들이 많이 오는지 알고 싶어졌다. 나름 이쁘다면 이쁘고 정겹다면 정겨운 느낌으로 문화적인 복고와 레트로를 뒤섞여 놓았는데 사람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개항이후 근대의 상업 중심지이자 항구와 관련된 지역이었을테니 어린이였던 나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졌을리는 만무하다
인천은 개항 이후 일본식 문화가 가장 먼저 들어온 지역이고 이후 거리상 혹은 산업적으로 근대의 성격과 일본의 냄새가 가장 짙게 배어날 수밖에 없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근대 거리의 성격이 갖는 불가피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천의 근대는 어찌 됐든 서양문물이 배를 타고 들어오는 관문이었고 이런저런 형태의 산업이 자리를 잡게 되는 대한민국 초기 산업의 첫 근거지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물론 그 성격이 일본의 식민지 수탈과 나름 식민지 시대에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고자 했던 조선인들의 치열한 삶의 교차점이 됐던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 이리라.
이런저런 가게를 기웃거리다가 일본식 소품을 파는 자그마한 가게에 발을 들여놓았다. 꽤나 나이가 든 아주머니 한분이 반갑게 손님을 맞고 초로의 아저씨는 나름 심심하면서도 귀찮은 표정으로 손님 같지 않은 남자인 나를 힐긋보더니 표정이 제 갈길로 간다. 무언가를 살 인간이 아니라는 결론 이리라.
일본의 식민지 수탈과 나름 식민지 시대에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고자 했던 조선인들의 치열한 삶의 교차점이 됐던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 이리라
아주머니는 일본의 유카타를 입고 있다. 일본 가게의 여주인들이 늘 그렇듯 언제나처럼 상냥하고 웃음 띤 표정을 지으며 제품과 가격에 대해 설명한다. 이 아주머니는 최근에야 가게를 열었고 일본서 살다가 한국으로 이주해온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바로 이곳에 온 것인지 지금의 가게에 함께 있는 남자가 진짜 남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본인이고 자신이 직접 일본에서 물건을 가져와서 팔고 있는 소품들이라 가격이 원래는 훨씬 비싼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실정을 고려해 아주 싸게 붙여 놓았다는 설명을 해 주었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결코 사고 싶지 않은 물건들이어서 어색하다만 표정을 지으며 애써 웃음기를 지우지 않으려 힘쓰고 있었다.
길거리를 둘러보기를 마치고 근대건축물들로 구성된 박물관들을 차례로 찾아 보기로 했다. 그냥 지나가 버리면어린 시절부터 보아왔던 일본식 건축물들이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에 불과할 테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이후 단 한 번도 인천의 역사와 산업화 과정을 체계적으로 둘러본 적이 없었다.
나이 들어 뒤늦게 고향입네하고 정겨움과 그리움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그 도시의 역사와 의미 그리고 오늘날의 위상 등에 대해서는 전혀 알고 있지 못한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스스로 의아해하며 왜 이런 거리감을 갖게 됐는지 자문해본다.
모든 건축물을 내가 설명하려 하면 지역문화해설사의 역할일 테지만 그렇게 알지도 못하고 스스로 찾아가서 꼭 둘러보기를 권하고 싶다.
우선 제18은행 인천지점이라는 곳을 둘러보고는 당시 인천의 개항과 역사들을 체계적으로 읽어보게 된 데에 대해 커다란 기쁨과 늦었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설명은 생략하고 사진만 감상하는 시간으로 변신.
다양한 인천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둘러보며 새롭게 내가 참 격동의 현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무엇 때문에 이 장소를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발버둥을 쳤는지 궁금해졌다. 나는 인천을 그렇게 벗어나 도대체 어느 나라 어느 곳으로 가고 싶었던 것일까.
괜히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오래전에 돌아가신 형님의 친구분 생각이 떠올랐다. 위암으로 세상을 등진지는 꽤나 오래전일인데 그 형님하고는 대학 때 이전부터 알던 사이였으니 햇수로 따지자면 40년은 족히 지난 사이였지 않았을까. 시간이 헷갈리기는 하지만 암튼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그 형님은 나에게 조심스레 그렇지만 진지하게 인천에서 자신과 함께 일을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었다. 그 일이라는 게 야학을 기반으로 한 사회운동 혹은 노동운동과 관계된 어떤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나지만 내가 완곡하게 거절의 뜻을 표했기에 그 일이 어떤 일인지는 잘 모른다. 그렇게 인천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접어두고는 인천이 내 기억속에는 과거로만 묻혀있었다.
나는 인천을 그렇게 벗어나 도대체 어느 나라 어느 곳으로 가고 싶었던 것일까
18 은행을 나와 옆에 있는 비슷한 건물로 가보니 이제는 조선은행이라는 커다란 팻말이 붙어있을 뿐 아니라 최초의 우편배달부 모습이 동상으로 떡하니 서있다. 삿갓에 담뱃대를 물고 가방을 들고 있는 그 최초의 우편배달부 모습에서 그 당시로서는 꽤나 의미 있는 선진적인 일이었을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고되고 고된 업무를 무슨 생각으로 시작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에 들어가 보니 건물은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 건물이다. 건물 내에는 인천지역에 근대에서부터 자리 잡은 다양한 형태의 기관이나 학교 교회 등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기록되어있다. 지역의 역사관 역할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역시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런 내력도 모른 채 어느 교회가 백 년이 넘은 교회라거나 어느 학교는 일제시대 전부터 있어왔대 등등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살아있는 역사를 친구며 형 그리고 아는 아저씨 아주머니에게 들었던 기억들이 파편처럼 남아있다. 그 기억들이 여기서는 지역의 역사로 기록되고 궁금한 이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저 한 마디가 생각난다. '나도 꽤나 옛날 사람이로구나' 현대보다는 근대에 가까운 이야기들에 더 익숙하고 낯설지 않은 느낌을 훨씬 많이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후에도 최초의 서양식 호텔을 비롯해서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많은 것들을 재현해 놓은 장소를 다시 찾았다 그리고는 물류산업의 보고로 역할을 해왔던 창고를 변신시킨 아트플랫폼.
초기 산업화의 결과물들을 간직하고 있는 창고들이 무너져 내리지 않고 그대로 살아남게 되어 다행이고 다행이라는 생각을 가지며 전면만이 아니라 뒷면을 둘러본다.
"그래 이 모습이야"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이 동네의 모습이란 화려한 문화 콘텐츠를 가지기보다는 옛 붉은색 벽돌 건물들이 즐비하고 집들은 검은색 일본식 2층 집으로 둘러싸인 기억이 대부분이다. 그 장소가 오늘날에는 역사와 문화가 입혀진 채 살아남았다. 내 기억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기억만으로서가 아니라 현재 새로운 모습으로 되살아나고 있으니 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내 기억이 소중은 하지만 그것이 현실의 모습 그대로라면 너무 슬프지 않겠는가.
어찌 보면 난 그 모습이 싫어 인천을 떠나 다른 곳, 목적지도 모른 채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떠나게 되었는데 말이다.
벽 겉면에 칠해지거나 조형물이 덧붙여진다고 옛 창고가 문화적으로 되살아 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공연이 많이 이루어진다고 재생이 됐다거나 활성화되었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곳에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찾아들어야 새롭게 되살아나는 것이다.
내 기억이 소중은 하지만 그것이 현실의 모습 그대로라면 너무 슬프지 않겠는가
못내 아쉬움과 가슴에 자리한 짠한 감정을 추스리지 못한 채 거리와 이별을 한다. 옆에 자리한 화교를 지나며 다시한번 쌍십절의 기억을 떠올리고 짜장면 거리를 지나면서 북적대는 짜장면 애호가들을 보면서 아직 아트플랫폼이 많은 사람들에게 자리를 잡으려면 시간이 꽤나 많이 필요하겠구나 싶다. 필요만큼이나 사람들 스스로의 노력도 어느 정도 되살아났으면 좋겠다.
물론 내가 태어난 장소를 도망가면서 마치 대단한 기억이라도 찾아낸 양 한 번쯤 찾아가 보는 그 안쓰러운 애향심이 아니더라도 고향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그런 것이 아닐까. 내 머릿속에만 살아있는 슬픔과 기쁨의 끝없는 교차점일 것이다.
다시 인천이라는 도시를 찬찬히 둘러보고 연구하고 싶어졌다. 고향을 공식적으로 떠난 지 약 35년이 지나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이 고장은 그보다도 더 오랜 최소 40년이 넘는 시간 저편의 기억인 셈이다. 오랜 시간이 흘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