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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야 바스크야? _1. 빌바오 가는 길

심리적 거리보다 훨씬 먼 물리적 거리

by 너구리

최근에 다녀온 스페인 빌바오에서의 여정과 그곳에서 느낀 도시재생 혹은 도시의 여운에 대해 기록한다. 빌바오라는 이름의 도시를 어렵게 와서 아쉽지만 8일간의 길지 않은 동안 둘러본 곳곳에서 느낀 심정을 도시재생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눈으로 기록해보고자 한다.


너무나 많이 들어서 인지 비행기를 타면 금세 도착할 것 같은 이 도시에 도착하는 시간은 상상 이상으로 오랜 시간을 요했다. 힘이 들고 지졌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긴 시간을 비행기에서 보낸 셈이다.


오는 여정을 요약하면 흔히 쓰는 말로 산 넘고 물 건너고 바다 건너 도착해야 하는 거리다.

제주의 동쪽 편 끝자락에서 살고 있는 이유로 아침 비행기를 타기 위해 6시 30분 차를 몰고 공항을 향했다. 차를 공항 주차장에 파킹 할 여력이 없으니 사무실에 들러 차와 타인이 사용할 수 있도록 키를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다시 짐을 챙겨 제주 공항에 도착하니 8시가 조금 안된 시간. 오랜만에 가져온 캐리어를 수하물로 붙이고 나니 마음이 한결 여유롭다. 한 시간여의 비행이면 서울에 닿으니 별 걱정할 일이 없는데 그런 심리적 거리와 상관없이 짐을 찾고 다시 공항 리무진을 타고 김포공항에서 인천공항까지 향한다. 인천공항 도착까지 교통편만 벌써 4번째다.


새롭게 열린 인천공항 제2터미널은 기존 터미널에서 한참을 가야만 한다. 4개의 항공사가 새롭게 이전을 해서인가 예전의 1 터미널에 비하면 번잡함이 한결 덜하다. 모든 것이 새롭고 느낌은 흡사 아시아의 모든 공항들이 그러하듯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출발층에 도착하면 바로 다리를 건너 메일 홀로 연결되고 아래쪽은 다양한 식당과 주차장 가는 길 등이 열려있다. 출발지를 가는 일은 쉽지 않을 것 같다. 아마도 도착층인 것이다. 십여 년 전 홍콩의 쳅락콕 공항을 수도 없이 들락 거리면서 그리고 싱가포르의 창이공항을 다니면서 봤던 공항의 구조와 매우 흡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저녁무렵에 도착한 파리 샤를르 드골 공항의 터미널에서 바라본 전경. 노을이 이쁘기 그지없다.

새로운 공항 시스템은 여기도 우리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곳곳에서 무인자동화를 도입한 흔적과 사회적 트렌드를 반영한 식당, 출국심사 등은 나를 너무 어렵게 만든다. 해외 출장이 뜸해지면서, 해외여행이 드물어지면서 세상의 변화를 감당하고 살지 못했나 보다. 그 이야기는 조금 나중에 다루기로 하고 우여곡절 끝에 보딩패스를 받고 수하물을 붙이고 출국장에 들어섰다. 보안검색대다. 이거야 매일같이 공항에서 실시하는 상시적인 일이니 너무 자연스럽다. 가방에서 노트북 꺼내고 재킷을 벗어 바지에 있는 모든 지갑과 잡동사니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가방을 보내면 된다.


한 시간여의 비행이면 서울에 닿으니 별 걱정할 일이 없는데 그런 심리적 거리와 상관없이 짐을 찾고 다시 공항 리무진을 타고 김포공항에서 인천공항까지 향한다. 인천공항 도착까지 교통편만 벌써 4번째다.


아무 일도 없으리라는 내 예상을 깨고 보안검색원이 나를 세운다. 가방을 열고 주섬주섬 뭔가를 꺼낸다. 치약이 크기가 커서 들고 탈 수가 없단다. 이런 젠장. 100mg을 넘으면 안 된단다. 액체만 그런 중 알았는데 치약도 걸리다니. 결국 평소에 사무실서 쓰던 치약을 뺏겨 폐기처분을 해야 했다. 출국심사를 무인으로 마치는 일도 낯선데 어쨌든 이래저래 심사를 마치고 나니 새로운 면세점 거리가 나를 반기고는 곧장 출국이다. 무인시대를 몸으로 체감한다. TV에서만 보던 로봇 같은 기기가 길거리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영 적응이 쉽지 않다.


시간을 알아본다. 11시간을 비행기 안에서 고스란히 앉아서 보내야 한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짧아진 느낌이다. 예전에 파리에 갔을 때는 14시간인가 13시간 탔던 기억이 나는데 그때에 비하면 많이 줄어든 느낌. 느낌뿐인지 실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암튼 견뎌야 한다. 다른 옵션이 없다.


장거리 비행을 하도 오랜만에 하는 때문인지 다른 생각이 안 난다. 2012년 호주 출장을 다녀올 때 이후 10시간 이상은 처음이니 오랜만이다. 아무리 해외출장을 유럽으로 간다고 하지만 힘든 것은 힘든 일일 뿐이다. 최대한 잘 수 있는 만큼 자야 한다.


평소에 읽기 어려운 책을 챙겨 왔다. 한때 이유 없이 붐이 일었던 샌달의 '정의란 무엇인가?' 파리행 비행기에서 내가 머릿속에 집어넣고 있는 근대 정치 철학자들의 정의와 자유 그리고 공리, 인권, 정언명령 등 다양한 주제와 벤담, 밀, 로크, 칸트 등 수십 년간 머릿속에서 과거로만 남겨두었던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 든다. 새롭게 읽으려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래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시간 집중력은 최고다.


다른 한 가지 인구증가로 인해 자본주의 경제체제 안에서 각 개인의 합리적 이윤추구가 사회 전체적인 면에서 어떻게 비합리적으로 환경문제 등 다양한 문제를 야기하게 되는지를 역설적 논리로 규명한 너무나도 유명한 논문을 들고 가는 용기를 냈다. 하딘의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 원문과 함께 번역본을 들고 가 한꺼번에 비교하며 읽어보기로 작심한다.

아무리 해외출장을 유럽으로 간다고 하지만 힘든 것은 힘든 일일 뿐이다. 최대한 잘 수 있는 만큼 자야 한다


늙은 이유이거나 이해력이 부족하거나 영어원문은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안 된다. 단어가 이해 못할 일이 아닌데 뜻이 전혀 머릿속에 남질 않는다. 어쩔 수 없다. 번역본을 비교해가면 본다. 시간을 보내는데 큰 도움이 됐다. 짧은 글을 읽는데 거의 두 시간 이상을 소비했다. 지금은 어떻게든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소비하는 게 최선이다. 그럭저럭 영화를 찾아보고 잠도 청하고 책도 읽는 척하고 약간의 상상의 나래를 펴고 정식과 간식류의 식사를 두 번 하고 나니 샤를르 드골 공항에 도착이다.


얼마만의 파리이던가. 남의 나라 수도인 파리가 뭐 그리 대수이겠는가마는 왠지 파리는 유럽의 관문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도시다. 파리에 와야 유럽에 온 것 같은 이 느낌은 뭐지. 실상 파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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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9_204315.jpg 연결통로를 통해 다른 터미널로 가는길. 수속(입국과 출국이 불분명)을 마치고 비행기 갈아타러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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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빌바오까지 가는 연결 편이 빠듯하다. 쉽지 않을 것 같다. 다행히 빌바오행을 택한 한국인이 엄청 많아 우리가 타지 않으면 비행기가 뜨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공항 도착시간은 현지시간으로 7시 50분. 한국시간으로 이미 날을 넘기고 3시에 가까워진다. 오후 2시 40분 비행기를 탓으니 이래저래 11시간이 걸린 셈이다. 시차가 7시간 난다. 아직도 여기는 저녁이다. 갈아타야 하는 비행기 시간을 보니 8시 35분 비행기다. 산술적으로는 어렵지 않은 시간인데 상상과 현실은 그래서 다른 셈이다.

남의 나라 수도인 파리가 뭐 그리 대수이겠는가마는 왠지 파리는 유럽의 관문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도시다. 파리에 와야 유럽에 온 것 같은 이 느낌은 뭐지

빌바오까지 가는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터미널이 원래의 터미널과 다른다. G터미널이란다. 공항 안내자가 트랜싯하여야 하는 승객들을 이끌고 단체로 이동 중이다. 함께 타야 하는 한국인들이 50명이 넘는다. 뭐 그리 빌바오에 큰일이 있다고 이토록 많은 인원들이 이 어려운 곳을 찾아갈까. 오늘내일 사이에 더 많은 한국인들이 이곳에 모인다고 하니 두고 볼 일이다. 잘 하면 한국인 판인 국제회의가 되겠다.


빌바오행 비행기는 같은 Air France지만 아담한 크기의 비행기다. 같은 일행들이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피곤에 지쳐 눈을 감고 대기 중이다. 비행기에서 내내 잠들어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그거고 한국시간으로 새벽 3시를 넘기고 있으니 피곤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


약 2시간 조금 못 미치는 시간이 지나 빌바오에 도착했다. 공항이 어찌 생겼는지는 알 방법이 없지만 생전 처음 도착한 스페인의 알파벳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 같은 알파벳인데 스페인어와 다른 알파벳이 하나씩 더 쓰여있다. 바스크어다. 비슷한 수준과는 완전히 다른 전혀 다른 단어가 쓰여 있다. 짐을 찾고 나서는 나가는 길을 찾을 길이 없다. 분명히 입국 수속을 밟아야 정상일 듯싶은데 도무지 부스가 없다. 사람들이 카트를 몰고 나간다. 그들을 뒤따른다. 엥... 문을 하나 나왔는데 그냥 바깥이다. 입국이 돼버렸다. 뭐 이런 입국절차가 다 있지 싶다.


아무런 제지나 확인이 없다. 이미 파리에서 이루어진 심사(입국심사인지 출국심사인지 불분명함)로 가름한 것인가. 공항의 안팎의 구분이 전혀 없다는 느낌만으로 이미 준비된 버스에 타고 스페인의 첫 밤거리를 스치듯 지난다.

20180929_232940.jpg 빌바오의 첫인상. 큼지막한 쓰레기통들
20180929_233504.jpg 차창밖을 통해서 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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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30_061545.jpg 드디어 빌바오에 도착했다

여전히 내 경험상 유럽의 모든 거리는 파리와 비슷하다는 선입견이 남아있다. 그러나 여기는 스페인이고 그것도 북부의 잘 모르던 도시인 빌바오이자 바스크 지역의 동네다. 스페인이되 스페인이지 않은 도시에 왔다. 스페인은 어떤 곳인지. 바스크는 또...

사람들이 카트를 몰고 나간다. 그들을 뒤따른다. 엥... 문을 하나 나왔는데 그냥 바깥이다. 입국이 돼버렸다. 뭐 이런 입국절차가 다 있지 싶다

호텔 로비에 도착에 시간을 계산해보니 아침 6시 반에 제주에서 집을 나선 지 25시간이 지나서야 호텔 로비에 도착했다. 먼 여정이다. 길다. 도무지 잠을 자야 하는데 잠이 올 것 같지가 않다. 걱정이다. 피곤한 건가 피곤해야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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