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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야 바스크야?_2. 빌바오의 새벽

새벽에 미리 보는 구겐하임과 네르비온 강가

by 너구리

어느 도시건 첫인상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도시에 대한 기억의 대부분을 장악해버리고 만다.


1시가 넘어 호텔방으로 들어오고 나서도 피곤함과 긴장감 혹은 낯섦이 겹쳐지는 시간과 공간을 겪고 있자니 정신적으로 멍한 상태가 계속된다. 해외여행이면 마음이 편해야 할 텐데 출장이라는 부담감과 함께 제주에 잔뜩 일을 널어놓고 도망치듯 비행기를 탓으니 그럴 만도 하다 싶다. 여전히 마음은 사무실 한편에서 다양하게 밀린 업무가 줄을 서서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다.


어찌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대충 잠을 청하는데 여간 불편하기 그지없는 소리가 계속 들린다. 카톡으로 온 보이스톡 소리가 계속 울린다. 잠을 부스스 깨어보니 사무실의 팀장중 한 명이다. 내가 여기에 왔는 줄 뻔히 알면서도 전화를 하는 걸 보면 여간 급한 일이 아니다 싶어 전화를 받는다. 이런저런 업무이야기를 하고는 다시 잠을 청한다. 잠깐의 시간을 보내며 잠이 들었나 했는데 이번에도 전화소리에 잠이 깼다. 일반전화다. 카톡이 아니고서는 전화를 받으면 요금이 장난이 아니니 일단 누군지 확인한다. 도청 담당 부서의 과장이다. 급한일인 모양이다. 일요일인데도 전화를 한 걸 보면... 또 업무를 처리하고 한국으로 전화해서 이런저런 조치를 취하고 나니 잠이 멀리 사라져 버렸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우려하던 사태다. 일요일조차 내 맘대로 시간을 쓰기 쉽지 않다.

쥬비주리 다리의 모습과 네르비온 강물에 비친 모습

현지 시간으로 새벽 4시 30분. 아직 해가 뜨려면 거의 4시간이나 남았다. 뭐하지. 책이라도 볼까. 옆에 같은 숙소를 쓰고 있는 선배는 내 소리에 깼는지 무언가를 주섬주섬 챙기고 호텔 로비로 나선다. 부지런한 분이다.


어찌하다 보니 6시가 되도록 자는 것도 아니고 깨어있는 것도 아닌 신세가 되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시내를 보고 싶다. 걸어서 10분 정도 되는 구겐하임과 호텔 바로 앞인 네르비온 강가가 궁금하다.

여전히 마음은 사무실 한편에서 다양하게 밀린 업무가 줄을 서서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다

무작정 옷을 차려입고 나섰다. 조깅이라도 하면 될 일이다. 강가에는 아직도 몇몇의 사람들이 하루를 채 마감하지 않은 듯 종종걸음으로 자신의 갈길을 가고 있다. 그들은 이 거리에서 새벽의 무언가를 위해 저리 바쁘게 걷고 있을까. 젊은 아가씨들도 한둘씩 무리 지어 지나는 것이 보인다. 밤새 즐거운 시간을 보낸 모양이다. 저들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신기한 구경거리이거나 경계대상일 것이다. 새벽에 늙수그레 동양인이 모자를 뒤집어쓰고 강가를 어슬렁 거리니 긴장이 되거나 이상할 것이다.


빌바오시를 관통하는 네르비온 강의 한가운데 세워진 쥬비주리 다리는 보행자 전용 다리이자 디자인의 수려함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될 정도로 유명한 다리다. 일단 차들이 지나지 않는 다리라는 점과 다리가 휘어져 있으면서 도시의 배경 역할과 수변공간의 풍경을 편하게 볼 수 있는 위치로 이 지역의 중심포인트 역할을 한다. 누구라도 이 다리에 처음 오르면 정겨운 도시의 모습에 마음을 멈추고 부러움으로 한참의 시간을 보내게 될 일이다.


강가를 걷다 보니 멀리서 구겐하임 미술관이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분명 다양하고 다기한 모양을 갖고 있지만 전체적인 위용이 눈앞에 다가오지 않는다. 구겐하임에 대한 아무런 정보나 사전조사 없이 산책 중에 느낌을 순수한 감각을 받아들이고 싶다.

누구라도 이 다리에 처음 오르면 정겨운 도시의 모습에 마음을 멈추고 부러움으로 한참의 시간을 보내게 될 일이다

그 순간 모양이 불분명한 건물들 앞에 커다란 거미가 아슬아슬하게 거리에서 나를 반긴다. 분명 아침이 되면 다양하게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들 테지만 새벽의 거리는 썰렁하고 텅 빈 거리를 위협적이고 기괴한 거미가 나를 위협하는 모양새다. 작품의 제목이 마망(엄마)라고 알고 있다. 늘 위태롭게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면서 자식들을 언제나 보호하려는 작가의 모성에 대한 의식을 반영한 작품이라 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나에게 이 거미가 보여준 첫인상은 공교롭게도 90년대 초 일본의 애니메이션이었던 '요수도시'가 떠올랐다. 인간계와 마계가 서로 공존하는 과정을 찾아가는 길에서 요괴들의 다양한 방해공작이 이루어지는데 그때 가장 대표적인 공격 요괴가 딱 저렇게 생겼던 기억이 남아있다. 작가의 의도와 반대로 받아들인 셈이다.

늘 위태롭게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면서 자식들을 언제나 보호하려는 작가의 모성에 대한 의식을 반영한 작품이라 했다

물론 제주의 시골집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는 현실세계에서 매일같이 함께 지내고 있는 가시거미와도 아주 흡사하다. 가시거미는 다리가 워낙 얇고 길지만 몸통은 매우 작아 겉에서 보이는 위압감에 비해 꽤나 유약한 상대여서 사실상 두려움없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시골 생활의 동반자다. 그 동반자가 예술작품으로 구겐하임을 찾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아무도 지나는 사람이 없는 구겐하임을 천천히 둘러보는 재미와 그와 어우러진 강가의 야경을 느끼는 첫새벽은 그 인상이 너무 강렬해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 깨닫기가 쉽지 않다. 여전히 나에게는 이곳이 프랑스와 같다는 느낌을 조작처럼 각인되어 있다. 스페인이나 현지의 당사자가 이 말을 들으면 달가워하지 않을 테지만...


건물의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일관된 모습이나 작품을 바라거나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곳에서 봐도 단 하나도 같은 곳을 찾을 수가 없다. 더구나 티타늄 판의 황금빛이 새벽녘의 조명을 받으니 굉장히 그로테스크한 미래 세계의 어느 한 시점으로 시간이동을 한 기분이다. 돌아가서 SF소설을 쓰되 배경을 이곳으로 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예술과 재생의 도시 빌바오에 SF의 뿌리를 내려볼까....ㅎ.ㅎ

건물을 한 바퀴 돌아보니 비로소 박물관의 입구를 알리는 간판이 보인다. 글자로 구겐하임을 알리기는 했지만 출입구가 그곳이 아니라 카페의 입구였다는 사실이 아이러니기는 하다. 실제 입구는 아래쪽 오른편의 작은 유리문들로 이루어진 곳이니 첫 방문에서 그것을 알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까.

티타늄 판의 황금빛이 새벽녘의 조명을 받으니 굉장히 그로테스크한 미래 세계의 어느 한 시점으로 시간이동을 한 기분이다

박물관 앞 광장에는 나름 유명한 강아지가 불빛에 반짝이며 파수꾼처럼 처연하게 앉아있다. 이 녀석은 매일 밤을 이곳에서 지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언뜻 보면 곰탱이스럽게도 생겼지만 조금만 신경 쓰면 강아지임을 금세 알 수 있다.


신새벽의 미술관을 정처 없이 걷고 있자니 밤새 이곳을 지키는 경비원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본다. 저 경비원의 입장에서 보자면 저놈은 미술관 개관이 한참이나 남았는데 왜 이곳에 와서 서성이고 있나 싶을 것이다. 정신이 나가거나 조금은 이상한 사람으로 여겼으리라.

장님 코끼리 만지듯 부분 부분을 만지며 전체를 상상하는 기분을 만끽하고 있다

건물을 한참 돌아보고서야 비로소 구겐하임 미술관의 전체 윤곽이 눈에 들어온다. 공교롭게도 이미 강을 건너와 미술관을 향해 걸어온 관계로 미술관 전체를 바라보는 조망을 다리를 건너고서야 알 수 있게 된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 부분 부분을 만지며 전체를 상상하는 기분을 만끽하고 있다. 이런 재미도 나름 나쁘지 않다. 전체를 모른 채, 곧 그 답을 알게 될 것이지만 그전에 부분 부분의 모습으로 전체를 상상해보는 재미란... 그래야 부분 부분도 제 역할이나 존재감을 강하게 부각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미술관 앞에서 보니 다리가 놓여있다. 멀리 터널로 연결되는 듯한 다리 위로 전망대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조망장소가 보인다. 천천히 다리를 건너자 전체 모습이 보인다. 비로소 알겠다. 왜 구겐하임 미술관이 군함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지. 그나저나 프랑크 게리라는 건축가는 어떤 생각으로 미술관을 설계했을까. 자신이 설계한 이 건물이 한 도시 혹은 재생사업에 기념비적인 역할을 하게 되리라는 점을 알고 있었을까. 예상했을까. 아니면 기대했을까. 멀리서 보는 구겐하임의 위용과 도시와의 조화를 천천히 즐기면서 아침시간이 가까워짐을 느낀다. 서서히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이제는 다리를 건너 강변에 놓여있는 미술관을 도시의 새벽 풍경과 함께 감상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강, 수변공간이다. 저 미술관이 넓은 평지나 산속에 있었어도 새로운 느낌이었지만 수변공간에 자리 잡으면서 더욱더 의미가 있었겠다는 생각이다. 잔잔한 강과 저 건물이 너무나 잘 어울리지 않던가.

자신이 설계한 이 건물이 한 도시 혹은 재생사업에 기념비적인 역할을 하게 되리라는 점을 알고 있었을까. 예상했을까. 아니면 기대했을까

다리를 건너며 전망대를 내려오니 이제는 현실의 세계로 돌아온다. 높은 다리를 건너기 위해 엘리베이터도 있지만 굳이 계단을 통해 도시의 숨겨진 모습을 보고자 한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어두운 곳에 숨겨진 벽면에 그려진 소박한 낙서와 무엇보다도 꽤나 발전된 도시라면 어디에나 존재하는 노숙자의 존재가 내 앞에 나타난다. 살며시 사진을 찍으려 하니 나를 의식한 듯 빤히 나를 쳐다보며 인상을 쓴다. 괜한 위압감을 느낀 때문인지 정면 사진을 찍을 수는 없다. 뭐라고 나에게 말을 하는데 스페인어를 알아들을 재주는 없으니 살며시 눈길을 외면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도시의 첫 사람과의 의식적인 만남이 노숙자라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는 경험이 아닐 수 없다.

다리의 밑에 그려진 벽화. 자립심이 강한 바스크족 여성을 묘사한 그림이다.
약간의 두려움으로 노숙자의 언저리밖에 사진을 찍지 못했다.

다시 도로의 반대편으로 다리를 건너 원래 왔던 길로 숙소를 돌아가기로 한다. 몇 시간 후면 이 길을 다시 올 테니 멀쩡한 날씨의 모습은 그때 가서 보고 느낌도 묘사하면 될 일이다.

도시의 첫 사람과의 의식적인 만남이 노숙자라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는 경험이 아닐 수 없다


돌아오는 길 빌바오에서의 두 번째 만남이 성사된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혹은 노숙자나 주취자인듯한 남자 한 명이 나에게 스페인어로 한참을 뭐라고 이야기한다. 느낌으로 봐서는 약간의 돈을 요구하는 듯하다. 술값이나 차비를 달라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주머니에 있는 지폐를 꺼내 돈을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스페인어를 못해요라고 영어로 대답하니 상대편이 말이 안 통한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알았다는 듯 뭐라 말을 하고는 제 갈길을 간다.


일반적인 새벽길의 주취자들이 비교적 격하게 반응하는 것에 비해 이곳 주취자들은 비교적 온건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도시의 기재를 잘 알지 못해 내가 느끼는 것이 사실인지 아니면 오해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어찌 됐든 도시와의 첫 만남은 다소 인상적이다. 노숙자와 주취자라니.



돌아오는 길 약간의 인상적인 조각상들을 만나고 오는데 어디선가 시끄러운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젊은 청년들인 모양인데 길거리에서 소란스러운 소리를 지르며 서너 명이서 계속 큰소리로 이야기한다. 싸우는 것은 아닌데 의미는 모를 일이다. 이윽고 길바닥에 병을 던지며 술병을 깨는 소리가 들린다. 그곳까지 가고자 하는 의지가 사라졌다. 병까지 깰 정도의 격함을 가지고 있다면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상책이다.

도시에 트램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낭만적인 모습인가

오늘 아침은 여기까지 하며 숙소를 걸어간다. 멀리서 트램이 천천히 내 앞의 정류소에 멎는다. 갑자기 부러운 생각이 든다. 도시에 트램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낭만적인 모습인가. 트램이라니...



20여 년 전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미국을 처음 가봤을 때 샌프란시스코 만의 트램과 천천히 움직이는 트램을 따라잡으며 올라타던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샌프란시스코를 한없이 부러워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좀 더 세련된 도시의 트램을 다시 부러워할 줄이야. 기술적으로야 아무것도 아닐 테지만 도시가 주는 분위기는 기술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문화가 있는 도시에서는 트램 하나도 문화가 되는 것이다.


쥬비주리 다리를 다시 건너며 강가에 비친 모습을 천천히 관조한다. 위에도 다리 물에도 다리가 비친다. 그 대칭이 묘한 여운을 주고 있다. 보행자 다리가 이래저래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내가 너무 흥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도시는 첫인상이 중요한 법. 빌바오를 느끼는 첫인상에서 시간대를 잘 잡았다. 복잡한 시간대를 도시의 첫인상으로 받았다면 빌바오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 자세나 태도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빌바오는 새벽에 자신의 첫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나에게 새로운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일요일이다. 어제 저녁 모든 사람들이 밤늦도록 놀고 귀가 했을 테니 오늘 아침에는 조용할 것 같다. 아니면 가톨릭 국가답게 모두 교회에 가려나.


몇 시간 후가 기다려진다. 피곤하기보다는 조금씩 배가 고파진다. 근데 한국은 몇 시지? 벌써 오후 2시가 됐다. 다행히 일요일이라서 연락이 안 온다. 조용한 오후 아니 새벽녘이다. 아침밥 먹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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