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3년차이신 줄 알았어요."
지금 직장 입사 6개월쯤 되었을 때 들은 말이다.
어딜 가도 마치 거기 오래 있었던 사람인냥 대한다. 자주 듣는 말이 두어 종류 되는데, 하나는 'n년차인 줄 알았는데 나보다 늦게 들어왔네?'와 다른 하나는 한 5년 전쯤 퇴사한 사람 이야기를 나도 마치 아는 사람인 것처럼 하는 것이다.
기분이 나쁠 일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참 적응을 잘하고 있는 것 같아서 뿌듯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가끔은 조금 슬퍼진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랄까?
중학생 때 학교에서 전교생을 대상으로 인적성 검사인지 성격검사인지 아무튼 꽤 구조화된 검사를 한 적이 있었다. 여러 항목에 대해서 또래집단에서 대략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나타내주는 결과지도 받았다. 다른 항목은 기억이 잘 안나지만 딱 두 가지가 기억이 난다.
하나는 결과지를 보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항목이었다. 수치가 상위 5%였다. 그렇게 높은 등수는 난생 처음이었다. 그런데 하필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라니. 그땐 잘 실감이 안났다. 내가 대체 뭘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인지. 당시에는 변화랄게 거의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바로 다음 칸에 더 놀라운 수치가 적혀 있었다. 정확한 단어는 기억 안나지만 대충 '환경에 대한 순응력'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항목이었다. 상위 2%였다. 그러니까 그 검사결과에 따르면 나란 존재는 변화를 상위 5% 수준으로 두려워하지만 일단 변화한 환경에 대해서는 상위 2% 수준으로 적응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단지 100m를 9초에 주파하는 나무늘보 같았달까. 그때 어렴풋이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부단한 자기부정의 삶을.
사실 지금 나는 변화를 그리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고 느낀다. 오히려 변화를 원한다. 쉽게 실증이 나는 편이기도 해서 주기적으로 주위 환경을 바꾸곤 한다. 직장도 마찬가지다. 2년이 넘으면 다른 일이 하고 싶어진다. 문제는 막상 변화를 실행에 옮기려할 때 일어난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를 이끌어내는 경우가 별로 없다. 인생은 늘 우발적이서 변화 역시 늘 엉망진창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건 변화 그 자체가 아니라 만족스러운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나의 무능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우 편리하게도, 나는 그 어떤 변화도 받아낼 수 있는 상위 2%의 적응력이 있다. 신입임에도 'n년차' 드립을 가능하게 하는 무적의 기술이다. 나는 이걸 순전히 '눈치빨'이라고 생각한다. 밉보이는 게 싫어서, 죽기보다 싫어서 눈치를 좀 많이 본다. 관찰도 많이 한다. 관찰 결과 아는 척도 많이 한다. 모를 때는 신입이고 알 때는 n년차다. 손해볼 것은 없다. 그래서 어딜 가든 꽤 빨리 인정 받곤 했다.
그런데 정작 나는 한 직장을 3년 이상을 다닌 적이 없다. 사실은 어디에도 적응을 하지 못한 것 아닐까? 아니다. 사실은 그 적응력이 필요한 유효기간 자체가 짧은 탓일 거다. 어디에서든 누구나 적응은 몇 개월이면 충분하다. 빠르냐 느리냐의 차이일 뿐이다. 적응 이후의 직장생활을 버티게 하는 건, 뭐랄까, 종합적인 직무능력태도자세마음가짐이다. 오래 버텨서 높은 성과를 내는 능력? 그런건 내게 없다. 딱 적응까지, 거기까지가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누구보다도 우발적 변화를 두려워하면서, 또 누구보다도 빠르게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마친 후에, 또다시 두려워할 변화를 온 몸으로 맞이해야 하는 시지푸스적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돌은 다시 굴러내려오기 마련이고 돌 굴리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다. 문제는 돌이 또다시 굴러내려오고 말 것이라는 점.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