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가 밟고 지나간 그날의 박하사탕

<박하사탕>

by 임재훈 NOWer

한 남자가 기찻길에 서 있습니다. 먼 과거로부터의 육중한 쇳덩이가 요란하게 경적을 울리며 남자를 향해 돌진합니다.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그 세월의 무게와 마주선 남자는 절규하듯 외칩니다. “나 다시 돌아갈래!”

이창동 감독의 2000년작 <박하사탕>은 격동의 70·80년대 한국사를 지나온 한 남자의 인생기차가 ‘현재’라는 종착역에 멈추는 과정을 비극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가 철길을 거슬러 올라가매 극의 흐름 또한 거꾸로 치닫고, 관객은 주인공 김영호(설경구 분)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아왔었는지를 목도하게 됩니다. 시간의 역행으로 진행되는 스토리라인은 1999년(현재), 사흘 전, 1994년, 1987년, 1984년, 1980년, 1979년으로 나뉘며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소제목을 갖고 있습니다. 도입부라 할 수 있는, 영호의 비참한 현재를 보여주는 90년대의 에피소드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어떤 연유로 저런 삶을 살게 된 걸까’라는 궁금증을 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궁금증은 80년대 초·중·말 전반을 다루는 전개부를 통해 해결되고, 79년도의 순수했던 대학생 영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대단원을 이룹니다. ‘순수→타락’인 영호의 삶을 굳이 시간을 거꾸로 돌려가면서 ‘타락→순수’의 형태로 보여주고 있는 까닭은 이 영화의 지향점이 ‘순수’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한 개인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타락하는 과정’이 아닌 ‘순수를 잃어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전개부인 1980년대입니다. 김영호는 70·80년대에 20대를 보낸 소위 7080세대입니다. 모든 7080세대에게 1980년 5월은 강렬하게 남아있을 것입니다. 격렬한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배경 안에서 청장년층이었던 그들은 무장한 공권력 앞에 처참히 스러져갔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의 투쟁은 민주화를 향한 선과 악의 대립으로 보일지도 모르나, 이 작품은 그런 이분법적 구분을 논하지는 않습니다. 김영호라는 인물은 당시 갓 입대한 이등병이었고, 계엄령이 선포된 상황에서 제 군장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그야말로 애송이에 불과했습니다. 첫사랑 순임(문소리 분)이 정성스레 보낸 편지와 박하사탕을 그는 반합 안에 고이 모셔두던 순수 청년이었지요. 허겁지겁 출동 준비를 하다 쏟은 박하사탕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던 군화들에 무참히 짓밟히고, 채 주워 담을 새도 없이 영호는 시위현장으로 투입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다리에 총상을 입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민간인 여학생을 총으로 쏴 숨지게 하는 실수를 범합니다. 이 대목에서 관객들은 영호에게 어떤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이창동 감독은 ‘그날’의 가해자로만 여겨지던 군인들에게 전혀 새로운 형태의 감정이입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지요. 영호는 아직 명령과 복종의 개념조차 파악되지 않은 이등병이습니다. 가슴 안에 첫사랑과 그녀의 박하사탕들을 담고 있었던 20대였습니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고 전날 밤 꾸었던 꿈에 의미를 둘 줄 알았던 감수성 예민한 대학생이었습니다. 그랬었는데, 군복이 입혀졌고 총이 들려졌고 ‘그날’의 거리로 내몰렸지요. 철저한 명령하복 관계가 군대라는 집단의 특성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영호라는 인물은 분명 피해자임에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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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영호는 경찰이 돼 있습니다. 영화에서 경찰이라는 직업은 군인 못지않게 잔인하게 묘사되는데, 취조 시 피취조자를 대하는 태도나 그들끼리 주고받는 음담패설 등이 그 예입니다. 신참 형사인 영호가 고참들로부터 일종의 신고식처럼 ‘첫 취조’를 허락받았을 때 터져 나오던 그의 광기는 앞선 1980년 5월의 그와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여기서 잠깐, 박하사탕이라는 소재에 대해 살펴보지요. 우리가 박하사탕을 쉽게 볼 수 있는 곳은 식당입니다. 식후 사람들은 보통 식당 계산대에 비치되어 있는 박하사탕 그릇 안에서 사탕 하나씩을 입에 넣곤 합니다. 입안에 도는 음식냄새를 제거할 목적인 것입니다. 또한 특유의 청량한 향은 마치 소화제를 마신 것과도 같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이처럼 박하사탕이 갖는 대표적 이미지란 ‘입냄새를 제거하고 입안을 개운하게 해주는 사탕’ 정도가 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영화를 수놓는 일련의 사건들과 그것들에 대한 묘사는 매우 지저분합니다. 취조 도중 영호의 손에 피취조자의 변이 묻는 장면, 아내의 불륜현장을 급습하는 장면, 차 안에서 회사 직원과 정사를 나누던 장면, 그런 여직원을 버젓이 집들이에 데려오는 장면 등은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관객이라면 관람하는 데에 다소 거북스러움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의 제목은 명백히 ‘박하사탕’이고, 극이 진행되는 동안 그것은 자주 언급됩니다. 더러운 저질로 전락해버린 영호의 인생에 박하사탕의 이미지가 겹쳐지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러우나, 이는 군홧발에 짓이겨진 박하사탕들처럼 타의에 의해 빼앗긴 그의 순수함에 대한 갈망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보입니다. 1980년대의 군인·경찰의 지위란 당시의 사회 지도 세력들, 요컨대 약자 위에 군림한 강자 세력의 일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영호가 제대 후 자신의 직업으로 그런 경찰을 선택했음에는 필시 지독한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고뇌가 있었겠지요. 자신을 찾아온 순임에게 부러 제 순수한 첫사랑에의 감정을 부정하듯 몹시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여주는 영호의 행동은 그래서 슬픕니다. 1980년대라는 공간에서 생존하기 위해 이렇듯 자신의 순수함을 버린 이들이 어찌 영호뿐이었겠습니까. 영화의 첫 장면, 영호의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절규는 아마도 그때 그 시절 무수한 청년들의 정체성을 앗아간 바로 그 ‘누군가’를 향한 감독의 엄중한 비난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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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망쳐놓은 놈들 중 딱 한 명만 죽이려고 샀다던 권총. 영호가 그 권총을 들이대며 읊조리는 대사가 무척 신랄합니다. “내 인생 망쳐놓은 놈들이 너무 많아서 그중 하나 고르기가 힘들다”고 말하던 대목 말입니다. 영호는 스스로를 피해자로 정의 내리는데, 그 주장에 대해서는 이견을 붙이고 싶지 않습니다. 자신의 일기장에 ‘인생은 아름답다’라고 적은 사내를 형사 영호는 마치 ‘이래도 인생이 아름답냐?!’라고 몰아붙이듯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또한 강도 높게 고문합니다. 영호는 그 남자에게 노골적으로 묻는다. 정말 인생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느냐고. 시간이 지난 뒤 어색하게 조우한 두 사람. 영호는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남자는 대답을 피합니다. ‘군부독재’였던 1980년대와 영호의 순수함 내지는 정체성을 상징하는 ‘박하사탕’을 서로 연관시킨다면, ‘군홧발에 짓밟힌 박하사탕’ 이미지야말로 이 영화의 주제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주는 극적 장치입니다. 민중 대(對) 군부정권 혹은 대학생 대 군인으로 일국의 젊은이들이 무력 대립한 당시의 비극은 ‘누군가’에 의해 조장된 편 가르기로서도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그 바탕은 역시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군대에 ‘끌려갔던’ 영호와 같은 인물들이지요. 영호가 시위 현장에서 여고생을 실수로 사살했듯이, 그들 중 일부는 원하지 않았던 폭력을 행사하며 그 죄책감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그렇게 시나브로 사회의 악으로 타락해갔을 테지만, 가슴 한편에는 지울 수 없는 피해의식이 늘 자리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이 글을 쓰는 저는 1980년대에 갓 태어난 세대이므로 그 시절을 이야기하는 것이 무척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만 하겠지요. 그러나 역사라는 것이 당대에 살았던 이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후대에 의해서도 조망될 수 있고, 또 그 나름의 해석들이 비록 당대인들이 수긍할 만한 것이 못 된다 할지라도 최소한 발언권 자체에 대한 권리는 주어질 수 있으므로 저는 담담히 소견을 이어가고자 합니다. <박하사탕>이라는 영화의 주인공은 명백히 ‘그날’의 가해자 집단에 속하는 인물입니다. 영화는 이 점을 간과하지 않습니다. 형사 시절 그가 폭력으로써 ‘약자’를 다루던 모습들이 그 근거이지요. 그러나 영화는 가해자로서의 김영호에게만 머무르지도 않습니다. 영호가 1980년대를 군인으로, 그리고 경찰로 보냈다는 사실은 그때를 기억하는 몇몇 관객들에게 어떤 반사적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총과 몽둥이로, 욕설과 고문으로 민중을 진압하던 그들에게도 순수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영화의 설정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관객들도 더러 있을 것입니다. 직접 각본을 쓴 감독 이창동이 이런 시선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각 에피소드들을 분할하는 기준점으로써의 용도 외에도 영화엔 이따금씩 기차가 지나가는 장면들이 등장합니다. 예컨대, 1999년 김영호가 사는 비닐하우스 집은 기찻길 옆입니다. 돌진하는 기차를 향해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소리치고, 극의 배경이 더 앞선 과거로 바뀔 때마다 삽입되는 거꾸로 가는 기차와 그 철길. 격동의 1980년대를 관통한 우리 역사의 기차는 참으로 잔인했습니다. 그 기차를 멈춰 세우려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치여 죽었습니다. 영호의 박하사탕을 깨부쉈던 그 기차, 그 이데올로기는 이 땅의 젊은이들을 좌우로 갈라놓았고, 어쩌면 지금까지도 그이와 저이 사이로 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기차가 밟고 지나간 그날의 박하사탕 조각들. 그 향이 아직 어딘가에 남아 있습니다. 분명 어딘가에는.





글_나우어(NOWer)

_회사에 다니며 영화 리뷰를 씁니다.

_저작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성공한 영화들의 스토리텔링 키워드 분석> (피시스북 출판사)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 (달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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