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크>
한 사람의 정서가 대양이라면, 상상력은 대륙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대양과 대륙이 지구를 이루듯 정서와 상상력은 누군가의 세계를 동그랗게 완성하는 것입니다. 먼 옛날 지구 대륙판은 갈라짐 없이 한 덩어리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다 오랜 시간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쪼개졌다고요. 치즈를 커팅하는 것과 같은 말끔한 분할은 아니었습니다. 크래커를 두 손으로 빠갤 때와 같이, 작은 대륙들이 점점이 흩어져 섬이 되거나 소국이 되거나 했습니다. 그렇게 어떤 곳에서는 이런 말을 쓰고, 또 어떤 곳에는 저런 말을 쓰는, 이른바 경계라는 것이 선명해졌죠. 지리학소년도 아니고 지리학도는 더더욱 아니라서 자세한 이론은 생략하겠습니다만, 왠지 지구의 땅과 바다의 사정은 한 인간의 성장 과정과도 흡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열 살 무렵까지만 해도 하나의 대륙판이었던 상상력이 중고등학생 때 심각한 균열을 맞아 이십 대로 접어들면서는 시나브로 조각이 나는 듯해서 말입니다. 서른 즈음에 이르러서는 산산조각(까지는 아니겠죠 설마)의 단계로 나아가고 말입니다. 상상력의 대륙을 신나게 모험 중이었는데, 별안간 땅이 갈라지며 지각변동이 일어난 형국이랄까요. 열 살 때는 ‘스무 살이 되면 이러저러한 일들을 할 테다’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스무 살에는 ‘아, 정말 열심히 해서 눈부신 삼십대를 맞이하고 싶다’ 포부를 키우고, 서른 살에는 ‘서른, 이런 건가. 사십대는 좀 달라야 할 텐데’ 다소 졸아든 꿈을 꾸게 되는 건 이 글을 쓰는 나만의 이야기이려나요. 십대, 이십대, 삼십대, 사십대 등등이 마치 어떤 분기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생의 마지막 극지를 편의상 여든 살 정도로 잡는다면, 이십대 때 상상력의 범위는 20~80, 삼십대 때는 30~80, 사십대 때는 40~80, 이런 식으로 왠지 지반의 기준이 조금씩 축소되는 기분이랄까요. 축소됨에 따라 각 연령대는 분절된 대륙판으로 나의 정서의 대양에 잘도 경계선을 만들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경우에 따라 어떤 상상력들은 흔적도 없이 가라앉기도 하고요. 하나로 이어져 있던 대륙이 여러 개로 나뉘면, 분명히 내 안의 땅임에도 땅과 땅 사이를 건너는 데 정서적으로 큰 수고가 필요해집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정서적으로’. 정서라는 대양이 차지하는 면적이 그만큼 늘어난 탓이겠죠. 육로가 분절된 대신, 바닷길이 지난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디 그리 쉽게 바뀝니까’라는 어른들의 말은, ‘바다를 건너기가 그리 쉽습니까’라고 들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이란 만만한 게 아니죠. 이를테면 오른손잡이가 왼손잡이로 바뀌는 일은, 오른손의 대륙에서 출항하여 왼손의 대륙을 향해 모험하는 것이죠. 그 항해에 성공한 이들은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동심이란 말입니다, 깨지고 조각나기 이전의 대륙입니다. 분열과 분별 없이 무한대로 뻗어나갈 수 있던 상상력! 아마도 모든 어른들은 그런 대륙의 기억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아주 아주 오래전, 거웃도 없이 하얗고 말랑한 피부로 둘러싸였던 그 땅을 ‘네버랜드’라 불러봅니다. 24시간을 나누는 중요한 분기점이 ‘퇴근’이 되어버린, 식구들과 함께할 때도 비즈니스 통화를 멈추지 못하는, 영화 <후크> 속 주인공과 같은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면, 가만히 상상을 해보는 겁니다. 팅커벨의 요술 가루에 재채기를 하며 깨어난 어느 새벽, 삼십 년 넘게 조각난 채였던 나의 대륙들이 다 맞춰진 명화퍼즐처럼 눈앞에 놓여 있습니다. 흐릿하기는 해도, 왠지 친숙한 그 그림 같은 유년기의 네버랜드로 나는 빨려들어갑니다. 어른의 몸, 어른의 정서로 시간을 거슬러 네버랜드에 도착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이고, 모든 것이 여리고, 모든 것이 변화무쌍한 세상. 어른의 세계와는 모든 것이 반대인 이곳 네버랜드. 감당하기가 만만하지 않습니다. 아이들로부터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피터는 우스꽝스럽기도 하면서, 괜히 내 모습 같아 측은합니다. “너는 원래 날아다닐 수 있었잖아.”라는 낯선 아이들의 귀여운 핀잔도 어쩐지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습니다. “우리 아들은 이다음에 커서 큰 인물이 될 거야”, “너랑 나랑은 제일 친한 친구니까 어른 돼서도 계속 같이 노는 거다”, ··· 영화 속에서 날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어른 피터처럼, 나 역시 무던히도 날아보려고 애썼던 건 아닌가 싶습니다. 끝내 뜀박질로 그치고 만 비상에의 열망은 아니었던가. 그런 숱한 미끄러짐의 순간이 거듭될 때마다, 상상력의 대륙은 조금씩 붕괴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날지 못한 피터가 동굴에서 그만 주저앉아버릴 때, 팅커벨은 말합니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려봐.” 이 한마디에 어른 피터는 동심의 ‘팬’이 되어 훨훨 날아오릅니다. 하늘을 난다는 것은 경계와 한계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뜻일 텐데, 현실의 어른 관객인 나는 여전히 ‘하늘을 날고 싶다’라는 경계와 한계에 꽁꽁 묶여 있습니다. 자책을 너머 자해에 가까운 윽박이,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들을 점점 정서의 바다 저편으로 흘려보내는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아무래도 아직은 네버랜드로 가기엔 무리인지도요.
글_나우어(NOWer)
_회사에 다니며 영화 리뷰를 씁니다.
_저작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성공한 영화들의 스토리텔링 키워드 분석> (피시스북 출판사)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 (달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