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시간이 주는 것
휴일도 없이 일 년을 공들였던 중요한 프로젝트가 끝났다. 제한된 시간 안에 강도 높은 업무를 해내야 했던 만큼 일이 마무리되고, 조금 긴 휴가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싸고 다음날 아침 바로 제주도로 향했다.
해야만 하는 일, 불편한 관계에 몸도 마음도 지쳐있던 나는 평소와 달리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자고 싶은 만큼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천천히 일어나 발길 가는 대로 동네 산책을 하고, 예쁜 커피숍이 있으면 커피도 마시고,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침대에서 뒹굴 거리다 슬리퍼 끌고 어디서든 바다가 보이는 동네 산책도 하고,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초등학생들 구경도 하며, 며칠을 지냈다. 긴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도, 꼭 받아야 하는 전화도 없는, 조용한 시간이었지만 꺼진 에너지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었다.
여느 날과 비슷하게 일어나 늦은 아침을 먹고 민박집주인이 건넨 달달한 커피까지 마시고 집을 나섰다. 며칠 동안 햇볕이 내리쬐며 뜨겁더니, 그날은 구름이 잔뜩 드리운 흐린 하늘에 간간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올레길이나 조금 걷다 오려고 길을 나섰던 나는 갑자기 오름이라는 데를 가고 싶어졌다. 며칠 전 한 무리의 관광객으로부터 추천을 받았던 오름이 떠올랐던 것이다. ‘제주는 오름’이라는 사람들의 말이 새록새록 생각났다. 민박집 옆방을 쓰고 있던 부부가 마침 지나가는 길이라며, 유명하다는 한 오름의 입구까지 차로 데려다주었다.
그렇게 나는 오름이라는 곳을 처음으로 가게 되었다. 사오십 분 정도 경사로를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올라갔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다리가 조금 힘들다고 느껴질 때쯤,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세차게 부는 바람과 가늘게 흩날리는 비. 날이 흐려 멀리까지 보이진 않았지만 오름에서 펼쳐진 제주 풍경은 가슴속 아래, 저 깊은 곳까지 시원하게 만들어 주기에 충분했다. 단단히 잡지 않으면 모자와 옷을 다 날려버릴 듯 부는 바람과 정상 가운데 분화구를 중심으로 펼쳐진 오름의 모습을 오래오래 눈과 마음에 담았다. 분화구를 중심으로 오름을 한 바퀴 천천히 돌았다. 힘들었던 마음, 복잡한 생각들을 세찬 바람에 날아가는 듯했다.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정상을 두 바퀴나 돌고 아쉬운 마음을 가득 안고 내려왔다. 내리는 비에 잔뜩 젖은 옷과 신발은 무거웠지만 지쳐 있던 몸과 마음의 에너지는 천천히 차오르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나는 백약이 오름, 거문 오름, 새별 오름 등 몇 군데의 오름을 더 오르며, 제주도에서의 남은 시간을 보냈다. 손 하나 까딱 할 수 없을 정도로 소진되었다 생각했던 몸에는 어느새 힘이 들어오고, 칙칙했던 마음의 색깔도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
힘들 땐 가만히 있는 것보다 뭐라도 하는 것이 낫다, 지쳤을 땐 몸을 쓰는 것이 오히려 에너지를 빨리 회복하는 방법이라고 하지만 정작 나는 그렇게 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쉰다는 건 내게 편안한 침대나 소파에 늘어져,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의미했다. 짜인 일정대로 움직여야 안심이 되고, 뭔가 제대로 된 여행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내게 그저 쉰다는 마음으로 갔던 제주 여행은 어떤 여행보다 몸과 마음을 충만하게 채워주었다.
복잡한 현실에서 벗어나 쉬고 싶어서,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싶어서, 나를 돌아보고 싶어서․․․.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많다. 그 여행을 통해 바라는 바도 다양하다. 어디든 떠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마음 한편에 작은 바람을 꿈꾸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새로운 곳을 방문하고, 낯선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는 경험도 좋다. 하지만 그 여행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 자기에 대한 새로운 발견 등 내 삶이 조금은 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육체적, 시간적 효율성을 생각해 보면, 편안한 집에 앉아 시원한 맥주 한잔에 좋아하는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는 게 훨씬 좋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말을 하면서도 무거운 짐을 꾸려, 떠나는 마음에는 그런 바람이 숨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회사 일은 힘들고, 직장인으로서의 커리어는 한계가 보일 때, 풀리기 어려운 인간관계로 고민할 때, 나 역시 많은 순간 그런 기대를 하며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그런 시간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김영하 작가의 말처럼 어쩌면 그건 ‘뜻밖*’에 일어나는 경험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뜻밖이란 생각이나 예상을 하지 못하는 우연의 어떤 순간이다. 예상하지 못한 우연한 경험을 원하면서도 나는 숙소, 여행지 정보, 이동 시간, 안전 등 ‘뜻밖’의 깨달음이나 통찰이 들어올 수 없는 여행 준비를 한다. 벼르던 여행이나 멀리 가는 여행일수록 더욱 그렇다. 허투루 보내거나 낭비되는 시간이 없도록 촘촘하게 일정을 짠다. 가봐야 할 명소, 여행지의 맛 집도 돌아다녀야 하고, 반드시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장소에서 인증 사진도 남겨야 한다. 혼자 가면 혼자 가는 대로 여유가 없고, 친구들과 함께 가면 더 정신이 없다. 거기에 ‘뜻밖’의 우연이 끼어들 틈은 없다. 그래서 늘 나의 여행은 미처 정리되지 못한 생각들과 몇 장의 사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희미해지는 기억으로 남기 일쑤였다.
낯선 경험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싶다면, 여행을 통해 새로운 에너지를 얻고 싶다면, 마음 가는 데로, 발길이 닿는 곳을 따라가 보는 건 어떤가? 때로는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은 어느 여행에서 ‘뜻밖’의 경험과 마주할지도 모른다. 그 시간을 통해 몸과 마음이 새롭게 채워지고, 다음을 이어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진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