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더 무거웠던 것은 아주머니의 삶의 무게가 아니었을까.
당직이 끝나기 20분 전,
선생님, 잠깐만요. 이 분만 좀...
이라는 말과 함께 만나게 된 환자분은 거구의 여자분이셨다. 주소( Chief Complaint. 응급실을 방문한 이유)가 6주간의 변비 및 오른 다리 통증이라길래 변비가 6주일이라는 게 말이 돼? 하면서 속으로 아무리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인턴이라지만 말이야 빵구야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을 딱 열고 들어서는 순간 순식간에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이 분은 족히 250 킬로그램은 되어 보이는 분으로 혼자서 거동이 불편한 분이셨다. 길버트 그레이프의 엄마처럼.
살짝 흔들린 내 눈빛을 설마 눈치채셨을까. 얼른 표정을 가다듬고 정중하게 물어보았다.
안녕하세요, 우리 레지던트 닥터 N이 오늘 어떻게 오셨는지 대략적으로 이미 전해줬는데 제가 환자분한테 직접 듣고 싶어서 다시 한번만 더 여쭈어 보려고요...
오른쪽 다리가 너무 아프시단다. 응급의학과 의사를 10년 넘게 하면 보통은 척 보면 이게 찢어야 할 농양인지 아닌지 금방 구분이 가는데 이 분은 지방층이 너무 두꺼워 당최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셀룰라이트의 물결을 살살 겉어가며 자세히 살펴보니 피부가 가죽처럼 변한 부분을 중심으로 욕창이 몇 군데 생겼는데 한 부분이 유독 뼈가 드러나면서 역한 냄새가 났다. 언제부터 이러셨냐고 여쭈어 보았더니 이렇게 사는 게 너무 우울해서 죽으려고 식음을 전폐했는데 결국 못 죽고 병원에 실려 가셨단다. 그때부터 오른 다리를 못 쓰게 되었는데 집에서 계속 있다 보니 냄새도 나고 이러다가는 안 될 것 같아서 병원에 가기로 마음을 먹고 오셨다고 했다. 문제의 변비 역시 6주 전에 변비약 먹고 변을 보신 후 계속 화장실을 못 가고 있다고 하셨다. 이 분 정도의 몸집이면 혼자서 거동은 못 하고 집에서 맨날 앉아서 생활하실 텐데, 그러면 6주간 변을 못 보신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평소에 생활은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해서 여쭈어 봤더니 20대의 따님과 함께 산다고 하셨다.
순간 아주머니의 그 공허한 삶의 무게가 느껴졌고, 그분이 오늘 여기까지 오시기에 정말 큰 결심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오늘 정말 잘 오셨다고, 여기까지 오시는 것도 정말 쉽지 않았을 텐데 결단하고 와 주셔서 정말 기쁘다고, 최선을 다 해서 돌볼 테니 걱정 말고 마음 놓으시라고 말씀드리고 문을 나섰다.
인생을 살다 보면 흑암 같은 순간들이 찾아온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그냥 누워서 가느다랗게 숨만 쉬고 있어도 하루가 지나가는. 그 혼자뿐인 것만 같은 지독히도 깜깜한 어둠 속에서 손에 잡은 것들 다 놔 버리고 그대로 그 어둠 속으로 침잠해버리고만 싶은 나날들. 그렇게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다 보면 그 어둠도 익숙해지고, 그렇게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심연의 암흑은 어느덧 일상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서서히 그 삶에 적응해 간다. 세상과 떨어져 나만의 그 어둠과 혼연일체가 되어 내가 있는 이곳이 흑암 속이라는 것도 잊은 채.
큰 마음을 먹고 병원을 찾아주신 아주머니의 삶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아주머니는 여전히 혼자서는 걸음조차 떼기 힘든 비대한 몸과 암울한 현실을 매 순간 마주쳐야 할 것이고 인생은 호락호락하게 아주머니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머니의 이 결단의 발걸음이 빛이 되어 아주머니 삶에 짙게 내린 흑암을 조금씩 밀어내며 다시금 아주머니가 빛의 세상에서 웃을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고 가만히 기도해 본다.
*사진은 길버트 그레이프(1993, What’s eating Gilbert Grape). 조니 뎁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지금과는 사뭇 다른 풋풋한 시절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