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철저히 자기 검열하는 삶을 살아왔다. 자기 검열은 아무도 강제하지 않지만 위협을 피할 목적 혹은 타인의 감정이 상하지 않게 할 목적으로 자기 자신의 표현을 스스로 검열하는 행위이다. 지금에서야 비로소 자기 검열이란 단어를 알고 그게 나 자신을 지속적으로 괴롭혀왔다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어릴 땐 내가 자기 검열을 하고 있는지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철저한 자기 검열이 내재화되어있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늘 스스로를 학대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마음이 어지러웠다. 머릿속의 생각도 지분율이 있다면 절반 이상은 자기 검열이 차지했다. 늘 그렇듯 나를 차지하고 있는 일부이자 일상이었기에 그게 스스로를 잡아먹고 잠식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끊임없이 위협을 느꼈고 위험 속에 살았다.
분명 상대가 잘못했고 그로 인해 내가 깊이 상처 받았지만 그 속에 나는 없었다. 혹시 그 사람이 나를 안 좋게 보면 어쩌지란 생각에 나를 위로해주기는 커녕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며 내 말과 행동을 살폈다. 뭘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상대방의 잘못이 9.9할이고 내 잘못이 0.1할이라 하더라도 상대를 탓하기보다 나를 꾸짖었다. 그게 일로도 이어졌다. 일을 하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고 모르는 게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누군가 그걸 지적하고 이야기해줄 수도 있다. 모를 수도 있어, 다음부터 잘하면 되지, 란 마음보단 내가 왜 그걸 몰랐을까, 내가 얼마나 부족하다고 생각할까, 라는 생각으로 어느새 잠식당한다. 답이 없는 생각이다. 애초에 내가 그걸 몰랐으니 모르는 걸 말해줬을 뿐인데. 그걸 몰랐던 내가 바보 같고 부족하게 느껴졌다. 또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으니 애초에 그런 고민은 나를 갉아먹을 뿐이다. 그런데 나는 그 일 하나로 스스로를 한없이 부족하고 초라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실은 그 부족한 부분은 이번을 계기로 알게 되었으니 다음부터 똑같은 실수로 반복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끊임없이 마음에 난도질을 하고 할퀸다. 그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또 생채기를 얹는다.
내 마음의 초점을 밖이 아니라 안에 맞추는 삶
물론 자기 검열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성장하고 지금까지 오는데 큰 지분을 차지했을 거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자유로워지려 한다. 이 단단하고 질긴, 숨통을 조금씩 조이는 딱딱한 철붙이 갑옷을. 나를 조금 편하게 놓아주려 한다. 어느 날 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무의식적으로 또 스스로를 꾸짖고 책망하고 있던 나 자신과 마주했다. 문득 그런 나 자신이 너무 불쌍하고 가여웠다. '내가 뭘 얼마나 잘못했기에 그렇게 스스로 야단치는 거야. 이 험한 세상 속에 오롯이 나를 보듬어주고 안아줄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는데.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못할 말을 왜 스스로에게 되뇌고 있는 거야. 그냥 모든 걸 품고 안아줄 수 있잖아.' 내 삶에 나 자신은 없었고 타인만 있었다. 내 눈치를 살피는 게 아니라 상대의 눈치를 살피며 살아왔다. 마음 렌즈의 초점이 안이 아니라 밖에 있었다.
참 어렵다. 내가 아니면 누가 나를 위로해주나, 누구보다 잘 알지만 쉽지 않다. 지금껏 나를 안아주기보다는 비난하고 꾸짖는 게 더 쉬웠던 삶을 살아왔기에,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토닥여주는 게 그리도 어려웠다. 용기 내 한번 내게 다가가면 1분을 참지 못하고 튕겨나간다. 관성의 법칙일까. 신호를 받아 잠깐 멈춰있던 자동차가 다시 움직여도 내 몸이 원래 자리에 있으려고 뒤로 밀려나는데, 30년을 자리 잡아온 내 생각들은 어떨까. 한 번에 되지 않는 게 당연하다. 그래도 나는 계속해서 노력해보려 한다. 나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나를 감싸주려 한다. 지금은 1분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나를 자책하는 길로 빠지지만 2분, 3분, 10분, 1시간 점차 늘려가려 한다. 그 구렁텅이 속에서 빠져나오는 연습을, 나를 좀 더 무조건적으로 아끼고 사랑하려 한다. 그리고 말해줘야지. 괜찮아, 다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