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의 여름, 우리가 머물던 시간
햇살이 창문을 뚫고 들어왔다.
벽에 걸린 시계는 오전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일요일, 오랜만에 아무 약속도 없는 날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커피 두 잔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진한 블랙,
하나는 우유거품이 살짝 얹힌 라테.
지호가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설탕 넣을까요?”
“괜찮아요. 오늘은 이 향만.”
그는 웃으며 내 쪽으로 잔을 밀었다.
이 향 봄 냄새 같지 않아요? "
나는 잔을 들어 향을 맡았다.
커피 향 사이로 라일락처럼 달콤한 냄새가 스쳤다.
”그러네요. 이상하죠, 여름인데 봄이 조금 남아 있는 것 같아요. "
”그게 좋아요. “
지호가 말했다.
”모든 계절은 조금씩 다른 계절을 데리고 오니까. “
우리는 테라스에 나란히 앉았다.
햇살이 뜨거웠지만, 바람은 부드러웠다.
멀리서 들리는 매미 소리와
지호의 웃음소리가 섞여서 여름의 배경음이 되었다.
”요즘엔 글 안 써요? “
그가 물었다.
”조금 써요. 근데 이제는 예전 같지는 않아요.
“어떻게 달라졌는데요?”
나는 잠시 생각했다가 대답했다.
“이전엔 지나간 일을 붙잡으려 썼는데,
지금은 그냥 지금을 남기고 싶어서 써요.”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제일 좋은 글이에요.
지금의 마음을 놓치지 않는 글.”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바람이 테라스 난간을 스치고 지나갔다,
햇살이 반사되어 유리잔 속에서 반짝였다.
나는 말했다.
“이 여름이 오래갔으면 좋겠어요.”
지호가 웃었다.
“그럼 그렇게 만들죠.”
그의 말은 단순했지만,
그 단순함이 마음 깊숙이 들어왔다.
그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시간의 속도가 달라졌다.
느리지만, 더 따뜻한 방향으로.
오후가 되자, 하늘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우리는 오래된 서점에 들렀다.
선풍기 소리가 구석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지호가 한 권의 책을 꺼내 내게 건넸다.
표지는 흰빛의 커튼이 흔들리는 사진이었다.
“이 책 제목이 좋아요, ‘사람이 머무는 시간.’”
그는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이런 시간을 살고 있는 걸지도 몰라요,
나는 조용히 웃었다.
“그 말, 마음에 남을 것 같아요.”
저녁 무렵 서점 밖 공기가 조금 식었다.
우리는 골목길을 천천히 걸었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그 불빛 사이로 작은 나비가 날아다녔다.
“가을이 오면 어떨까.”
내가 물었다.
“가을이 와도 여름은 우리 안에 남을 거예요.”
지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괜찮네요.”
그의 손이 살짝 내 손등에 닿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대화보다 확실한 마음이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노을이 지면서
서로의 그림자가 겹치며 길게 늘어졌다.
밤이 되자,
하늘은 여전히 뜨거운 색을 머금고 있었다.
나는 그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봄은 그리움의 계절이었고,
여름은 머무름의 계절이었다.
누군가를 떠올리는 대신,
누군가와 같은 공기를 마시며
오늘을 살아가는 일
그게 얼마나 단순하고도 큰 기적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집으로 돌아와 노트를 펼쳤다.
새로운 페이지에 천천히 썼다.
“그해의 여름,
우리는 같은 빛 아래에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은, 아직도 내 안에 머물러 있다.”
펜을 내려놓자, 창문으로 밤바람이 불었다.
커튼이 살짝 흔들리며 방 안으로 여름의 향이 들어왔다.
그 향 속에서 나는 느꼈다.
이 여름은 지나가도,
우리의 시간은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