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의 봄, 라디오
라디오에서 이문세의 (옛사랑) 아 흘러나왔다.
DJ의 낮고 따듯한 목소리가
“이 노래, 오랜만이죠?” 하고 흘려보내자,
테이프 돌아가는 소리가 작은 숨처럼 들렸다.
그해 봄,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운동장 흙바닥은 해가 들면 금빛으로 말랐고,
하굣길엔 교문 앞 문방구에서 풍선껌을 씹던 아이들의
웃음이 늘었다.
아직 디지털이라는 말조차 낯설던 시절.
손끝엔 늘 연피심의 가루가 묻어 있었고,
친구들끼리 주고받던 쪽지엔 작은 하트와 삐뚤빼뚤한 글씨가
남아 있었다.
나는 교실 맨 뒷자리, 창가에 앉아 있었다.
햇살이 창문을 타고 들어와 책상 위로 번졌다.
칠판에 분필 긁히는 소리, 교실 끝의 선풍기 윙 --
하는 소리.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운동장 아이들의 함성.
그 모든 게 하나의 음악 같았다.
그리고 그 음악 속 앤,
언제나 한 사람의 얼굴이 섞여 있었다.
그 애
두 번째 줄 오른쪽 창가 쪽.
긴 속눈썹, 살짝 고개 숙이며 웃을 때 생기던 눈가의 그림자.
그 애는 교과서를 펼 때마다 손가락 끝으로
종이를 한 번 쓸었다,
그 작은 버릇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나는 말 한마디 걸지 못했다.
하지만 쉬는 시간마다 시선을 보내는 일은 멈출 수 없었다.
그 애가 친구와 웃으면 내 하루가 조금 더 환해졌고,
그 액 감기라도 걸린 날엔 왠지 공기마저 조용해졌다.
책상 서랍 속엔 늘 카세트테이프가 있었다.
빨간 잉크로 ‘이문세 6집’이라 적어둔 테이프.
테이프의 한쪽이 늘어져서 연필로 돌려야 했고,
볼펜 끝으로 조심스레 감아 넣던 그 동그란 소리.
그것마저도 그 시절의 박자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분식집에서 튀김 기름 냄새가 바람에 섞여 있었다.
문방구 진열 잘 안에는 반짝이 펜과 수첩들, 그리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문세의 목소리
“기억해요 그대를...”
가사는 다 들리지 않았지만,
그 한 문장이 마음 깊숙이 박혔다.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이상하게도 그 애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햇빛 아래 번지던 머리카락, 하얀 교복 셔츠의 주름.
그리고 눈을 맞추면 금세 다른 데를 보던 표정.
밤이면
나는 책상 위 라디오를 켜고 작은 목소리로 주파수를 돌렸다.
“여기는 MBC FM, 지금은 9시 10분입니다.”
잡음이 섞인 그 목소라조차 따듯했다.
노트에 숙제를 하면서, 테이프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만 말했다.
‘내일은 꼭, 인사라도 해볼까.’
하지만 다음날도, 또 그다음 날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봄은 천천히 흘러갔다.
꽃은 만개한 봄이지만
나에게는 마치 멈추어 있는 봄 같았다.
봄 소풍을 가는 친구들의 얼굴은 웃고 있지만
내 얼굴은 겨울과 봄 사이의 얼굴이었다
아이들의 얼굴은 '완연한 봄'이라면,
나에게는 아직 '초봄' 과도 같은 날이었다.
얼굴도 마주할 수 없던 그 수줍음을 하고 있던
학생처럼.
지금도 가끔 오래된 라디오에서
(옛사랑) 이 흘러나오면
나는 그 봄으로 돌아간다,
교실의 창가, 연필심의 냄새, 분필가루,
그리고 말하지 못한 마음 하나.
그때의 나는 여전히 내 안 어딘가에서
조용히 웃고 있다.
그 애를 바라보던 그 시선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