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세트테이프 끝에서
봄비거 내린 다음 날, 하늘이 유난히 맑았다.
학교 운동장엔 물 웅덩이가 군데군데 남아 있었고
아이들이 일부러 그 위를 밟으며 뛰어다녔다.
장난기 섞인 웃음소리, 젖은 운동화 냄새,
그리고 흙먼지와 햇살이 섞인 공기.
모든 게 조금 더 선명해 보이던 날이었다.
그 애는 여전히 같은 자리, 같은 자세였다.
하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펜을 들 때마다 손목이 햇빛에 반짝였다.
나는 괜히 볼펜을 돌리며 그 움직임을 따라가곤 했다.
쉬는 시간, 친구들이 농구하러 나갔을 때
교실은 잠깐 텅 비었다.
그때, 그 애의 책상 위에 반쯤 열린 필통이 보였다.
흰 지우개에 작게 새겨진 이니셜.
‘J.M’
나는 이유도 모른 채 그 알파벳 노트에 옮겨 적었다.
그때부터 내 노트의 구석엔 언제나
그 알파벳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라디오를 켜고 카세트를 넣었다.
어제 녹음해 둔 이문세의 (옛사랑)을 처음부터 다시 들었다.
테이프가 돌아가는 동안,
나는 빈 노트 한 장을 꺼냈다.
“안녕. 나는 너랑 같은 반에 있는 사람이야.
너는 아마 내가 누군지 모르겠지...”
몇 줄 쓰다 말고, 디시 펜을 멈췄다.
편지를 쓸 용기도, 줄 끝까지 문장을 이어갈
자신도 없었다.
나는 그저 노트의 첫 문장만 바라보다가
카세트테이프가 딸각 소리를 내며 멈출 때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테이프를 꺼내 뒤집으며 나는 생각했다.
사람의 마음도 이렇게 감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현실의 마음은
언제나 감는 법을 몰랐다.
그냥 끝까지 가서 ‘딸깍’ 소리룰 내며
멈춰버리는 것뿐이었다.
며칠 뒤, 학교에선 학년 단체사진을 찍었다.
햇살이 너무 강해 모두 눈을 가늘게 떴다.
사진사가 “하나, 둘, 셋!” 외칠 때,
나는 무심코 그 애를 바라봤다.
셔터 소리와 동시에, 그 애가 고개를 돌렸다.
아마 우연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짧은 눈 맞춤이
내 마음속에 오래 남았다.
그날 밤, 사진관 앞을 지나며
유리창에 붙은 단체사진 인화물을 봤다.
수십 명의 얼굴 사이에서
나는 한 사람만 찾고 있었다.
그 아이의 얼굴은 흐릿했지만
웃고 있었다.
나는 그걸 본 순간,
가슴이 이상하게 따뜻해졌다.
그리고 문득, 라디오에서 들리던
이문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사랑이란 게 이런 걸까...”
그 문장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나는 천천히 집으로 걸었다.
밤바람이 불었고,
길가의 가로등 아래에서 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 그림자 옆엔
그 아이의 그림자가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