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의 봄, 라디오

여름이 오기 전, 마지막 라디오

by 정서하

여름이 오기 전, 마지막 라디오

학교 앞 가로수에 연둣빛 잎이 짙어졌다.

햇살은 점점 하얗게 변했고,

운동장 모래는 발자국 하나 남기지 못할 만큼 말라 있었다.

교복셔츠 소매를 접으면 팔에 땀이 맺히는 계절.

봄은 그렇게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끝나고 있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아직 그 봄의 중간 어딘가에 멈춰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그 애를 향한 마음만은 계절을 따라 가지 못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학교는 일찍 끝났고,

나는 집으로 가는 길 대신 문방구 앞 공중전화로 향했다.

100원짜리 동전을 넣고, 라디오 사연 번호를 눌렀다.

DJ가 읽어주는 사연들 속엔

‘짝사랑’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많았다.

나는 수화기를 손에 쥔 채 한참을 망설였다.


‘혹시 내 이야기도 읽힐까?’


하지만 결국, 전화를 끊었다.

목소리를 남기기엔 마음이 아직 너무 서툴렀다.

밤이 되자 라디오를 켰다.

“오늘은 봄의 마지막 주말입니다.”

DJ의 말이 흘러나왔다.

그 말 한마디가 이상하게 마음을 아프게 했다.

창문을 열면,

따듯한 바람이 커튼을 밀고 들어왔다.

그 바람 속에는 먼지와 꽃가루,

그리고 어딘가에서 피워둔 고소한 밥 냄새가 섞여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이문세의 (옛사랑) 이 흘러나왔다.

잡음 섞인 멜로디 사이로,

테이프가 돌아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섞였다

그 노래를 들으며,


나는 노트 한 장을 꺼내 짧게 썼다.

“오늘은 봄이 끝나는 날.

하지만 내 마음은 아직 봄 한가운데 있다.”

그 문장을 쓰고 펜을 내려놓았다.

창밖에서는 개미소리가 들리고,

거리의 가로등이 노랗게 번져 있었다.

모든 게 조금씩 변하고 있었지만,

내 마음만은 여전히 제자리였다.


며칠 뒤, 그 애가 교실 창가에서 손을 흔들었다.

누구를 향한 건지 몰랐지만,

순간 나는 그 손짓이 나를 향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만으로 하루가 빛났다.

그러나 다음 주부터는 시험 기간이었고,

그 애는 점점 바빴다.

봄은 완전히 저물어간다.

복도 끝 화분의 라일락 꽃잎이 바닥에 흩어졌고,

하늘은 점점 하얗게 번져갔다.


그날 밤

라디오의 마지막 사연 시간.

나는 용기를 내어

짧은 편지 한 통 보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이런 건가요.

아무 일도 없는데,

그 사람이 웃으면 하루가 따뜻해지고,

그 사람이 고개를 숙이면 세상이 조금

어두워져요.”

DJ는 내 사연을 읽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내 마음은 이미 그 문장 속에 담겨 있었으니까.

읽히지 않아도 괜찮았다.


사랑은, 원래 혼자서 완성되는 것일지도 몰랐으니까.

라디오를 끄자,


테이프가 ‘딸각’ 소리를 냈다.

그 소리와 함께 봄이 완전히 끝난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안의 마음은,

아직 감기지 않은 테이프처럼

어딘가 느슨하게 남아 있었다.

그 마음은 그렇게 여름을 맞았다.

햇살은 변했지만,

내 안의 봄은 여전히 같은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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