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수술

'엄마'라는 이름으로

by 정서하

울 엄마는 1958년생 개띠, 올해 예순일곱이다.
나이로만 보면 아직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지만,
엄마는 이미 큰 수술을

세 번이나 받으셨다.

첫 번째는 신경외과에서 받은

머리 수술이었다.
찾아보니 파킨슨병 치료를 위한

수술이라고 했다.
하지만 큰 차도가 없었고,

결국 두 번째 수술을 하게 됐다.
첫 번째는 부분마취였지만,

두 번째는 가슴을 열고 기계를 삽입해야 해서

전신마취가 필수였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올여름,

엄마는 허리 수술을 받으셨다.
척추관 협착증과 측만증, 여기에 심한 골다공증까지 겹쳐

수술을 신중히 결정해야 했다.
게다가 예전에 신경외과 수술을 받으셨던 터라 진료기록지를

타 병원에서 가져와야 했다.
하지만 엄마가 아픈 것만 덜 수 있다면, 그 정도

번거로움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엄마와 병원에서 만나기로 하고,

예약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잠시 기다리며 엄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는 간호사에게 커피라도 드려야겠다고 하시며
원내 커피숍으로 향했다.

“간호사들이 얼마나 바쁜데, 고생이 많잖아.”
그 한마디에 엄마의 마음이 보였다.

아이스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하고,

시간이 되어 진료실로 들어갔다.

의사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에도 정형외과가 있는데,

굳이 다른 병원에서 하실 이유가 있나요?”

엄마는 단호하게 대답하셨다.
“여기서 머리 수술을 두 번이나 했는데 차도가 없었어요.

허리까지는 맡기고 싶지 않아요. 신뢰가 가지 않아서요.”

진료를 마치고 서류를 받아 들고 병원을 나왔다.
숨이 막히는 여름 더위였지만,

체력이 약해진 엄마를 보고는 투정이 나오지 않았다.
엄마는 이제 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이젠 내가 엄마의 보호자가 된 것이다.

어릴 적 내가 입원했을 때마다,
엄마는 나를 씻기고 먹이고, 병원 밥이 맛없을까 봐
좋아하는 반찬을 싸 오시곤 했다.
이젠 그 자리가 바뀌었다.
엄마를 보살피고, 엄마의 손을 잡고

병원 복도를 걷는 사람이 내가 되었다.

엄마는 스물셋에 나를 낳고, 두 아이를 키우느라 청춘을 다 바쳤다.
없는 돈 아껴가며 교복, 학용품, 도시락까지 손수 챙기셨다.
다행히 나는 입맛이 까다롭지 않아, 엄마가 해주는 건 뭐든 다 잘 먹는 아이였다.
그렇게 엄마는 자신의 인생은 잠시 접어둔 채, 평생을

‘엄마’라는 이름으로만 살아오셨다.

시간이 흘러 수술 당일이 되었다.
오빠가 먼저 병원에 도착해 엄마를 수술실로 모셨다고 했다.
그날 아침, 나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남편과 병원으로 향했다.
평소엔 40분이면 가는 길인데, 그날따라 차가 유난히 막혔다.

“엄마가 수술실에서 나오기 전에는 꼭 도착해야 하는데…”
조마조마한 마음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닿은 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가 뚫렸고,

병원에 도착하자
남편은 주차하러 가고 나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는 그저 한 가지 바람뿐이었다.
‘제발, 아무 일 없이 수술 잘 끝나게 해 주세요….’

두 번째 수술까지는 내가 직접 간병을 했지만,
이번에는 통합간병 시스템 때문에 보호자가 병실에 들어갈 수 없었다.
면회 때마다 환자가 직접 나와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다른 보호자들도 “이게 무슨 시스템이냐”며 불만을 쏟아냈다.
그렇게 엄마는 병원에서 한여름의 삼복더위를 보내셨다.

엄마의 모습을 보며 자연스레 아빠 생각이 났다.
친정아빠는 병원 침대에서 6년을 누워 지내시다
벚꽃이 흩날리던 봄날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서인지 봄이 오면 유독 아빠 생각이 난다.

이제는 엄마와 오빠, 그리고 나 — 셋뿐인 친정 식구.
엄마마저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
몸에 좋다는 건 뭐든 무조건 엄마부터 챙기게 된다.

나는 결혼 17년 차, 한 아이의 엄마이자 아내이며 딸이다.
자식을 키워보니 이제야 부모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내 영혼을 갈아서 키운 내 자식,
내 청춘을 다 바쳐 키운 내 새끼.
엄마도 나를 그렇게 키우셨겠지.

엄마는 예순이 되기 전까진 일을 하셨다.
그러나 여러 번의 수술을 겪으며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그런 엄마는 늘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신다.
나는 그 말이 싫어서, 어느 날 버럭했다.

“미안하단 말 하지 마요!
손주 대학 가는 거 보고, 결혼도 보고, 증손주도 봐야죠.
그때 가도 늦지 않아요!”

그렇게 말했지만, 엄마는

지금도 여전히 미안하다고 하신다.

예전엔 눈물 한 번 보이지 않던 엄마였는데,
이제는 사소한 얘기에도

눈시울을 붉히신다.
마치 어린아이가 되어가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친정에 가면 일부러

수다쟁이가 된다.
엄마가 외롭지 않게, 웃게 하려고.
엄마도 나를 보면 수다가 끊이지 않는다.
그 시간만큼은 우리는 서로의 친구가 된다.

이래서 엄마와 딸은,

평생 가장 오래된 친구이자
가장 든든한 가족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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