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 눈으로 주를 보게 됐습니다. _욥42:5
1 그러자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며 말했습니다. 2 "나는 주께서 모든 일을 하실 수 있고 계획하신 일은 무엇이든 이루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3 잘 알지도 못하고 주님의 뜻을 가린 자가 누구입니까? 내가 알지도 못하는 일들을 말하고 너무 기이해서 알 수 없는 일들을 내가 내뱉었습니다. 4 간구하오니 들어 주십시오. 내가 말하겠습니다. 내가 여쭙겠으니 대답해 주십시오. 5 내가 주에 대해 지금까지 내 귀로만 들었는데 이제 내 눈으로 주를 보게 됐습니다. 6 그래서 내가 스스로 한탄하며 티끌과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합니다." 7 여호와께서는 욥에게 이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진노했다. 너희는 나에 대해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않았다. 8 그러므로 너희는 수소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 자신을 위해 번제를 드려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이다. 그러면 내가 그 기도를 받아들여 너희의 어리석음대로, 너희가 나에 대해 내 종 욥처럼 옳은 말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갚지 않겠다." 9 그러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했고 여호와께서는 욥의 기도를 받으셨습니다. 10 욥이 그 친구들을 위해 기도를 마치자 여호와께서는 욥의 상황을 돌이키셨고 전에 있었던 것보다 두 배로 더해 주셨습니다. 11 그러자 그 모든 형제들과 자매들과 전에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그 집에서 함께 먹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보내신 모든 고난을 위로하고 달래며 각각 은 한 조각과 금가락지를 욥에게 주었습니다. 12 여호와께서는 욥의 말년에 초년보다 더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양 1만 4,000마리, 낙타 6,000마리, 소 1,000쌍, 암나귀 1,000마리를 갖게 됐습니다. 13 그는 또 일곱 아들과 세 딸도 얻었습니다. 14 그는 큰딸을 여미마, 둘째 딸을 긋시아, 셋째 딸을 게렌합북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15 온 땅에서 욥의 딸들만큼 아름다운 여인들은 찾아볼 수 없었고 그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준 것처럼 딸들에게도 유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16 이후로 욥은 140년을 더 살면서 아들들과 손자들, 나아가 4대 자손까지 보았습니다. 17 그러고 나서 욥은 나이 들어 수명이 다해 죽었습니다. _욥42:1-17, 우리말성경
무대를 휘감던 거대한 회오리바람의 형상과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고, 혼돈스럽던 조명은 고요하고 맑은 빛으로 바뀐다. 욥은 잿더미 위에서 조용히 고개를 든다.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항변이나 절규가 아닌, 깊은 경외와 깨달음이 담겨 있다. "이제 내 눈으로 주를 보게 됐습니다"라는 그의 고백과 함께, 그는 스스로 티끌과 재를 뒤집어쓰며 온전히 엎드린다. 그의 첫 모습과 같은 '잿더미 위'이지만, 이제 그 의미는 고통의 자리가 아닌 경배의 자리로 완전히 변화되었다.
하나님의 음성이 다시 한번 울려 퍼져 세 친구들을 책망하고, 그들의 역할이 완전히 역전되는 순간(욥이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이 연출된다. 친구들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인다. 욥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장면 이후, 무대는 따뜻한 조명 아래 욥의 새로운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드는 모습으로 전환된다. 모든 인물들이 무대 위에 모여 조화를 이루는 마지막 장면을 끝으로,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지며 긴 연극의 막이 내린다.
이 마지막 장면은 연극의 모든 갈등이 해소되는 대단원이다. 핵심은 욥의 회개가 친구들의 주장처럼 '숨겨진 죄'에 대한 자백이 아니라, 하나님의 광대하심 앞에서 자신의 '무지'를 깨달은 겸손의 표현이라는 점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고통 속에서 항변했던 욥을 '옳게 말했다'고 인정하시는 부분은 이 연극의 가장 큰 반전이자 주제이다. 마지막 회복 장면은 인과응보적 보상이 아닌, 모든 시련을 통과한 신실한 종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축복임을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내가 주에 대해 지금까지 내 귀로만 들었는데 이제 내 눈으로 주를 보게 됐습니다. _욥42:5
하나님을 본 자로 사느냐 보지 못한 자로 사느냐. 믿는 자의 삶의 태도는 여기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눈으로 보기를 원한다.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관심 가질 이들이 많을 것이다.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신 분이라 하셨기에 욥은 하나님을 실제로 눈으로 본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욥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셨다. 그리고 이전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은 신앙의 자리로 들어가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등장하신 후 욥을 책망하는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았으나, 사실은 욥에게 친밀함을 나타내신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어느 창조주가 억울함을 토로하는 피조물에게 친히 설명을 해주시겠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욥기 내내 욥은 하나님을 향해 있었다. 하나님과 대면하기를 원했고 하나님의 설명을 듣기 원했다. 그가 알고 있던 하나님이 있었으나 그것을 말하며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알고 있던 모습과는 다른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고자 몸부림쳤다. 하지만 욥의 친구들과 엘리후는 그저 자신이 그동안 알아온, 자신의 생각 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말할 뿐이었고 친구 욥이 왜 그런 상황에 놓였는지 하나님께 여쭙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욥을 향해 자기 자신을 던져넣을 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의 광대하심을 말씀하시면서 인간이 함부로 그 뜻을 규정하고 자신의 틀 안에 가두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인 것인지 보여주셨다. 그런데 한편으로 하나님께서는 욥을 통해 진정 당신께서 원하시는 백성들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도 보여주신 것이 아닌가 한다.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과 대면하기를 원하여 진정 하나님을 의지하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길 수 있는 자로 변화되어 가기를 원하신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그 어떤 절박하고 비참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강건한 신자로 자라가기를 원하신 것이 아닌가 한다. 그것이 신자의 궁극적으로 가야 할 목표다.
욥기의 마지막에서 하나님은 이 길고 긴 논쟁의 최종 판결을 내리신다. 놀랍게도 그 판결은, 신학적으로 옳은 말을 쏟아냈던 친구들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항변하고 씨름했던 욥이 "나에 대해 옳게 말했다"는 것이다. 친구들은 하나님을 '인과응보'라는 인간의 논리 안에 가두고, 그분을 변호한다는 명목으로 고통받는 이웃을 정죄했다.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신념 체계를 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욥은 달랐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자신의 신앙 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면서도, 결코 하나님 자신을 향한 질문과 부르짖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항변은 불신이 아니라,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결국 욥이 얻은 것은 고난의 이유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 아니었다. 그는 대신 하나님 '자신'을 얻었다. "귀로만 듣던" 지식의 하나님이, 이제는 "눈으로 보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되셨다. 하나님은 '왜?'라는 질문에 답하지 않으시고, '내가 누구인가'를 보여주심으로써 모든 질문을 압도하셨다. 이 연극의 모든 고통과 논쟁, 그리고 침묵은 결국 이 영광스러운 만남을 위한 무대장치였던 셈이다. 욥의 회복은 단순히 고난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불과 같은 연단을 통과하여 하나님을 직접 만난 자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차원의 삶, 즉 은혜의 결과였다. 욥기는 우리에게 고난 없는 삶이 아닌,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분의 주권적인 선하심을 신뢰하는 진짜 믿음으로 나아오라고 초청하고 있다.
#하나님
#욥
#대단원
#욥기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