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슴살이도 기왕 할 거라면 대감집에서
저번 주 월요일 첫 출근을 한 후 어느덧 2주 차 업무를 무사히 끝냈다. 첫 주는 회사 보안 프로그램이랑 개발 툴들이랑 이것저것 컴퓨터에 세팅하고 일할 때 누구한테 확인받고 물어봐야 하는지 전체적인 프로세스 익히는 데만도 정신이 없었는데, 둘째 주부터 본격적으로 코드 뜯어고치기, 코드 리뷰받기 등등 진짜 개발자스러운 일들을 하기 시작하면서 아침 스탠드업 미팅에서 말할 거리도 슬슬 생기고 있다.
지금껏 제대로 된 인수인계 절차와 교육시스템이 갖추어지지 않은 회사나 초기 스타팅 멤버로서 나 스스로 업무 프로세스를 만들어야 하는 회사만 다녀봤어서, 출근 첫 한 달은 매일 절벽에서 밧줄만 매고 번지점프하는 기분이었다. 그치만 이번 회사에는 모든 안전장비를 다 챙겨 입고 패러글라이딩 하는 기분으로 업무에 적응하는 중이다. 적당한 긴장감이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무섭지는 않은 상황이랄까ㅋㅋ 내가 혹시 실수한다 해도 그 누구도 나를 비난하지 않을테니 부담 가지지 말고 뭐든 물어보라며 다들 친절하게 대해주고 있다. 출근 첫날부터 나를 전담으로 케어하는 사수가 배정되었는데, 신입시절 사수가 있어본 적이 없었어서 이런 것까지 하나하나 가르쳐주는구나 당황스럽다 싶다가도 이 사수 없어지면 어떡하나 걱정이 된다.. 사수는 호주인인데 나처럼 워킹 홀리데이를 왔다가 팀에 조인한지는 6개월 정도 되었다고 한다. 근데 다음 달에 비자가 만료되는데 회사에서 비자 지원 못해준다 해서 호주로 돌아가야 한다고... 아무리 개발자라 한들 주니어에게 비자를 내어주는 후한 인심을 가진 회사는 없나 보다ㅠㅠ
출근 첫날 우리 팀 조직장이 휴가라 다른 팀 조직장이 온보딩 미팅을 해줬는데, 내부 프론트, 백엔드 개발팀원들은 각각 100명 정도 되고, 프리랜서로 일하는 외부 개발자들까지 합치면 꽤 큰 개발 조직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전체 몇 명인지 말해줬는데 까먹음;;) 사실 그동안 온라인 부문에 투자되는 비용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작년 코비드 사태가 터지면서 모든 오프라인 샵을 닫아야 하다 보니 갑자기 온라인 부문 투자가 내부적으로 엄청나게 늘면서 개발자들을 많이 충원했고, 앞으로도 계속 확장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 나이에라도 개발자로 넘어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역시 나이 먹고 못할 일은 키즈모델과 고등래퍼 출연밖에 없다
아무튼 내가 소속된 조직은 Digital Development 부문 산하 Care bears라는 귀여운 이름을 가진 팀이다. (남편이 전 직장에서도 bear 같이 생긴 캐릭터(=라이언)를 care 하더니 여기서도 bear를 돌봐주는 거냐는 개드립을 쳤다...세상에) 보다폰 가입자들이 웹페이지에서 가입정보, 요금정보, 결합상품 정보들을 확인할 수 있는 대시보드 페이지를 만드는 일을 한다. 이미 그런 페이지가 있긴 하지만 무려 20년 전에 만들어진 페이지라.... 할말하않... 그래서 현재 가입자 대시보드 페이지 레이아웃을 업데이트하는 일을 메인으로 하면서 Hyperscaling이라 칭해지는 아예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는 일들도 하고 있다. Dlopme
Digital Developmentd
저번 프리랜서로 일할 때와 가장 큰 차이점은 모든 업무가 정교하게 세분화되어있다는 점이다. 프로덕트 매니저가 칸반 보드에 필요한 세부사항들을 정의해 카드를 발행해 놓으면 개발자들과 함께 그 구현 사항이 가능한지, 난이도는 얼마나 될지를 결정하는 Refinement 미팅을 한다. 그 미팅에서 정해진 난이도를 핸들링할 수 있는 개발자들에게 업무가 배분되고, 매일 스크럼 마스터가 주관하는 스탠드업 미팅을 통해 업무가 잘 진행되고 있는지를 체크한다. 혼자서 한 페이지를 전부 다 만들어야 하는 일은 거의 없고, 모든 업무는 컴포넌트 단위, 혹은 UI 요소 단위로 세분화된다. 그렇게 세분화되는 만큼 유닛 테스트를 꼼꼼하게 짜는걸 중요하게 고려하고, 테스트 커버리지는 90% 이상으로 항상 유지하도록 퀄리티에 신경을 많이 쓴다. 다른 사람들이 짜 놓은 코드들을 읽어보며 배우는 게 정말 많고, 그동안 내가 얼마나 휘뚜루마뚜루 되는대로 빨리빨리 마인드로 일해왔는지를 반성하게 되었다 ^_ㅠ
그리고 혼자 일할 때는 내가 백엔드도 프론트엔드도 다 담당하는 사람이다 보니 그냥 내 마음대로 다 뜯어고치면 되었는데, 이제는 한 줄의 코드를 고치더라도 확인해야 할 사항들이 많아졌다. 변경되는 UI에 따라 API 응답이 제대로 날아오는지, 그렇지 않으면 백엔드 개발자에게 요청을 해서 데이터 스키마를 바꿔달라고 하고, 바뀌면 예상되는 다른 컴포넌트들의 오류는 없는지 꼼꼼히 확인해가면서 다른 개발자들과 계속해서 소통해야 한다. (누가 개발자는 입 다물고 코딩만 하면 된다고 했냐...) 다들 재택근무 중이지만 거의 하루 종일 슬랙과 비디오 챗으로 의견을 주고받고 회의하느라 또 영어가 엄청나게 늘고 있다.. 마치 돈 받으면서 코드웍스 다시 하는 기분ㅋㅋ
무엇보다 가장 좋은 점은 아토믹 디자인 패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지라 모든 디자인 요소들은 이미 라이브러리로 대부분 개발되어있어서 예전처럼 하루 종일 HTML 마크업 하고 CSS 디버깅하느라 애써야 하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는 것이다. (야호!) 블록 조립하듯이 필요한 것들이 있다면 가져다 쓰면 되다 보니 이제는 정말 깔끔하고 확장성 있게 코드를 짜는데만 집중할 수 있게 되어서 넘 행복하다ㅠㅠ
어제는 처음으로 라인 매니저와 월간 캐치업 미팅을 했다. 내가 잘 적응하고 있는지 묻기에 이미 카드를 세 개 해결했다고 하니 2주 만에 이렇게 빨리 적응하는 주니어는 처음이라며 칭찬해주었다..ㅋㅋ 라인 매니저와는 테크니컬 한 질문을 주고받는 건 아니었고 전반적인 회사생활에서 어려운 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상대적으로 편한 미팅이었다. 나에게 배정되는 사수 외에도 다른 팀에 소속된 미드레벨 이상의 개발자 한 명을 내 멘토로 지정할 수 있는데, 그 멘토와 주기적으로 미팅하면서 다음 레벨로 진급하려면 어떤 점을 보완해야 하는지를 상담할 수 있다고 한다. 아직 누가 배정될지는 모르지만 웬만하면 여자 멘토가 배정된다면 좋을 것 같다. 엔지니어링 분야가 남초 분야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남초일 줄이야...^_ㅠ 그나마 프로덕트 매니저들 중에는 여자가 꽤 있는 거 같은데 개발 조직엔 정말 희귀하게 여자 개발자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각 레벨별로 필요한 역량들이 정의된 체크리스트가 담긴 Progression Board도 공유해주었는데, 그 보드를 보고 나니 내가 다음 레벨의 개발자로 성장해나가려면 어떤 걸 보완해나가야 하는지 명료하게 보이는 느낌이다. 매니저에게 악쓰고 떼써서 진급시켜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체크리스트의 80% 정도를 채울 수 있게 되면 그 레벨로 진급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데, 각각의 체크리스트에 대해 내 PR 내역이나 커뮤니케이션 히스토리 혹은 교육받은 내역을 증빙해야 한다. 마케터로 일했을 땐 내가 이렇게 죽도록 일해봤자 뭐가 남나 싶은 생각에 열심히 일할수록 지치기만 했었는데, 내 업무 내역 모든 게 진급의 증빙자료로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업무를 꼼꼼하고 책임감 있게 해 나가야겠다는 의욕이 샘솟는다.
출근한 지 2주차가 되니 내 복지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My choice 포털 계정이 생성되었다. HR 담당자가 연봉 협상할 때 우리 복지 진짜 좋다고 어필할 땐 뭐 그러려니 했는데 복지 사이트 접속해보니 뭐가 이리 많은지 다 챙기기가 벅찰 정도;; Life insurance, Income protection, Free health screening 같은 무료 혜택도 있고 내가 돈을 더 내야 하는 추가 사항들도 있는데 그다지 쓸만하지 않거나 이미 남편 회사에서 커버해주는 게 있어서 굳이 더추가하지는 않았다. 혹시나 쓸지 안 쓸지는 모르겠지만;; 출산휴가는 거의 1년을 쓸 수 있는데 그중에서 16주 기간 동안은 full-pay를 지급하고 출산휴가 기간을 다 쓰지 않고 미리 회사에 복귀하면 보너스를 준다.
그나마 정말 유용한 건 Sharesave라는 주식 쉐어링 제도이다. 임직원들이 20% 할인된 가격으로 매달 월급의 일정 부분을 쪼개어 보다폰 주식을 살 수 있는 스킴인데, 은행 저축 이자보다야 낫겠지라는 마음으로 적금 들듯이 부어보기로 했다. 그 외에도 심카드 요금 80% 할인, 가족 통신비 40% 할인이라던가 체력단련비 지원, 제휴업체 디스카운트 같은 소소한 복지혜택들도 있다. 특히 제휴업체 중엔 M&S, Tesco, Waterstones같이 내가 자주 이용하는 곳들도 있고 이케아도 제휴업체 중 하나라 이사 갈 때 쏠쏠하게 할인받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ㅋㅋ
암튼 이번 회사가 내 커리어의 첫 번째 제대로 된 대기업 경험인데 이래서 다들 머슴살이를 하더라도 대감집에서 해야 한다고 하는구나..싶을 정도로 모든 게 참 푹신푹신하다. 주니어로서 차근차근 케어 받으면서 성장할 수 있는 환경, 내 삶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제도를 잘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안정감이 느껴진다. 내가 원하던 연봉에 푹신한 복지 혜택까지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 다음 진급 협상 시기에는 미드 레벨로 올라갈 수 있도록 내 역량을 쌓는데만 집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