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햇살 아래 텃밭을 거닐다가, 마른 줄기 끝에 달린 밤콩이 바스락거리며 흔들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거무죽죽하고 볼품없어 보이는 꼬투리 속에 촘촘히 자리한 콩알들을 들여다보면, 마치 작은 우주를 품은 듯 경이롭다. 내가 어려서부터 보아 온 콩은, 단순한 밥상 위의 재료가 아니라 삶 속에 스며든 추억이자 삶의 지혜였다.
콩의 종류는 참 다양하다. 가장 친근한 건 밥상에서 흔히 만나는 검은콩과 서리태, 그리고 된장과 간장을 빚는 데 꼭 필요한 메주콩이다. 콩나물을 키우는 황금빛 콩도 있고, 잔치 때면 송편에 곱게 갈아 넣던 녹두도 있다. 작고 단단한 대두부터, 울퉁불퉁한 강낭콩, 알록달록 예쁜 팥까지—콩은 작지만 각자 다른 빛깔과 쓰임새로 우리 식탁을 풍요롭게 해 주었다.
내가 무엇보다 좋아하는 건 콩국수다. 여름철 뙤약볕 아래 땀을 뻘뻘 흘리며 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차가운 콩국수를 한 그릇 내주시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하얗고 고소한 국물이 면발 사이사이 스며들어 입안 가득 퍼질 때, 온몸이 시원하게 풀리곤 했다. 심심한 맛에 소금 한 꼬집을 살짝 더해 먹던 그 순간이, 여름의 피로를 잊게 만드는 작은 행복이었다.
그러나 콩은 먹는 즐거움만 주었던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밤콩을 따다가 꼬투리를 툭툭 터뜨리며 놀던 기억이 있다. 마른 꼬투리는 작은 딱총이 되어, 서로를 향해 튕겨내며 깔깔대던 웃음소리가 마을을 가득 메웠다. 또 어떤 날은 검은콩을 바닥에 뿌려 ‘콩주머니 놀이’를 하거나, 동그란 콩알을 구슬 삼아 돌멩이 위에서 굴리며 놀기도 했다. 장난감 하나 변변치 않던 시절, 콩과 꼬투리만 있어도 하루가 짧게 느껴질 만큼 재미있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밭에서 직접 콩을 따는 일도 드물고, 시장에 가면 손쉽게 포장된 콩을 살 수 있다. 하지만 밤콩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안에 담긴 풍경들이 다시금 떠오른다. 아궁이 앞에서 메주콩을 삶아 콩비지를 퍼 주시던 할머니의 손길, 겨울이면 두부를 직접 떠서 따뜻한 국물에 김치 한 조각 곁들이던 가족의 저녁상, 그리고 여름날 콩국수를 먹으며 웃던 순간까지모두가 한 알의 콩 속에 살아 숨 쉬는 듯하다.
콩은 그저 작은 씨앗에 불과하지만, 우리 삶의 밑바탕을 지탱하는 존재였다. 때로는 건강을 지켜주는 먹거리로, 때로는 놀이의 친구로, 또 때로는 고단한 일상에 위로를 건네는 한 그릇 음식으로. 오늘도 밤콩을 바라보다가, 그 속에 담긴 수많은 추억과 의미를 다시금 곱씹는다. 작지만 단단한 콩알처럼, 우리 삶도 그렇게 소박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