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by 지금은

오늘 하루는 시작부터 뭔가 어긋나는 듯했다. 아침에 서둘러 나서느라 평소에는 꼭 챙기던 우산을 깜빡하고 두고 나온 것이다. 평소 같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을지도 모르지만, 유난히 흐려 보이던 하늘은 곧 내 예감을 틀리지 않게 만들었다. 오전 내내 부슬부슬 내리던 빗방울이 점심 무렵에는 점차 굵어지기 시작했다. 창밖을 스치며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유리창을 가득 적시고, 그 너머 풍경은 마치 안개처럼 뿌옇게 변해갔다.

나는 도서관에 앉아 책을 펼쳐 들었지만, 눈은 활자를 따라가지 못했다. 평소라면 소란한 세상과 거리를 두고 책 속으로 빠져들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인데, 오늘은 유독 산만해졌다.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끊임없이 귀에 스며들었고, 문득문득 현관 쪽으로 시선이 갔다. 사람들이 도서관을 나서며 하나둘 우산을 펼쳐 드는 모습은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그들은 저마다의 색깔과 무늬를 가진 우산을 머리 위로 받치고, 물기 어린 바람을 뚫으며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저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앞으로 나왔다. 바닥은 이미 드나드는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인해 젖어 있었고, 반짝이는 물웅덩이마다 형형색색의 우산이 잠시 비쳤다가 사라졌다. 나는 아무 할 일도 없이 벽에 기대 서성였다. 누군가는 약속 장소로, 또 다른 누군가는 집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럴 수도 없는 채로 이곳에 묶여 있었다. 빈둥빈둥 시간을 흘려보내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보이면서도, 이상하게도 마음 한편이 차분해졌다.

비를 피해 집으로 돌아가는 문제는 지금 당장 나에게 큰 걱정거리였다. 하지만 동시에, 이 상황은 오래전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때는 우산이라는 것이 참 귀한 물건이었다. 집안에 몇 개 되지 않아 아침마다 누가 먼저 챙길지를 두고 작은 전쟁이 벌어지곤 했다. 나는 늘 느린 편이었기에 종종 우산이 남지 않았다. 그럴 때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온통 비와 함께였다. 옷은 금세 흠뻑 젖어 살갗에 달라붙고, 신발 속은 물로 가득 차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찰박거렸다. 그럼에도 이상하게도 그 시간은 마냥 괴롭지만은 않았다.

빗속에서 친구들과 함께 집으로 걸어가던 장면이 아직도 선명하다. 서로 장난삼아 물웅덩이를 밟아 튀긴 물에 비명을 지르고, 젖은 머리를 손으로 털어내며 깔깔 웃었다. 집에 도착하면 어머니는 젖은 옷을 마루에 널어 말리고, 따뜻한 국 한 그릇을 내주셨다. 차가워진 몸이 서서히 데워지던 순간, 비를 맞으며 걸어온 길마저도 따뜻한 추억으로 바뀌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황순원 작가의 단편 「소나기」가 떠올랐다. 국어 교과서에서 처음 읽었을 때의 인상이 지금까지도 마음속에 남아 있다. 소년과 소녀가 소나기를 피해 들판에 함께 서 있던 장면, 그리고 비에 젖으면서도 그 사이가 더 가까워지는 순간은 어린 마음에도 묘한 울림을 주었다. 비라는 것이 단순히 불편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때로는 두 사람의 마음을 묶어주고 특별한 기억으로 남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나는 도서관 현관 앞에서 빗줄기를 바라보며, 오늘 나에게 찾아온 이 작은 불편이 오히려 오래된 기억과 문학 속 장면을 불러낸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우산을 챙기지 못한 사소한 실수 덕분에, 나는 한동안 잊고 있던 나의 어린 시절과 감성을 다시 만나게 됐다.

사람들은 여전히 우산을 펴고 도서관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발걸음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이 기다림이 조금은 소중하게 느껴졌다. 책은 읽히지 않았지만, 나는 책보다 더 깊은 이야기로 들어가 있었다. 빗소리는 내 귀를 어루만지며 기억을 불러내고,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 주었다.

비가 언제쯤 그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조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오래 이곳에 머물며 이 시간을 음미하고 싶었다. 기다림 속에서 나를 찾아온 기억과 사색이 값지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언젠가 빗줄기가 잦아들고 햇살이 다시 얼굴을 내밀면, 나는 발걸음을 옮겨 일상으로 돌아가겠지. 하지만 그때에도 오늘의 이 기다림은 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을 것이다. 비가 만들어낸 사소한 틈, 그리고 그 속에서 마주한 나 자신을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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