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무의미를 떠올리며

by 지금은

병실 문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묘한 긴장감이다. 늘 낯선 풍경에 잠시 주춤하게 된다. 하얀 벽과 정제된 공기 속에서 그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이미 수척했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살아 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왜 나야? 왜 하필 나야?”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남들보다 조금 더 성실하게 살았을 뿐인데, 왜 나만 이런 병에 걸린 거야?”

억울함과 공포, 그리고 어떤 버림받음의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병원 침대 위에서 마치 세상 전체가 자신을 배신한 것처럼, 신을 원망하고 운명을 저주했다.

“평생 가족과 주위 사람을 도우며 살았는데, 이런 게 돌아오는 대가인가요?”

며칠 동안 그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은 울분으로 젖어 있었고, 나는 그 곁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노력하면 쾌차할 것이라는 말을 주었다. 단지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는 거라고는 손을 잡아주고 잠시 말라빠진 팔다리를 주물러주는 것뿐이었다.

“의술이 날마다 발전하고 있으니, 희망을 갖고 재활 운동을 꾸준히 하다 보면 곧 일어서게 될 겁니다.”

불 꺼진 병실에서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새벽 공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한동안 매일 집으로 전화를 했다.

“죽고 싶지도 않은데, 살 수도 없다는 게, 이런 게 지옥이겠죠.”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이미 몸의 상태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통에 몸을 떨었고, 점점 그의 정신까지 잠식해 들어갔다. 예상한 대로 신체는 점점 야위어가고 말은 어눌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도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며칠 전까지 분노로 가득하던 표정에는 낯선 평온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창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분노가 가라앉자, 이성을 찾은 듯했다.

“이제는 왜라는 생각이 점점 무의미하게 느껴져요.”

목소리는 여전히 약했지만, 그 속에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오랫동안 이유를 찾으려 애썼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이게 벌이라면, 대체 어떤 죄 때문일까?”

하지만 답은 없었다. 그는 그 무의미 속에서 조금씩 지쳐갔고, 마침내 그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더 이상 신을 원망하지 않았다.

“신이 있다면, 아마 인간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고통만 주지 않을까요?”

말은 믿음이라기보다, 자신을 달래는 한 줄기 이성처럼 들렸다.

나는 철학자가 아니지만, 순간 그의 말이 어떤 철학자의 언어보다 깊게 느껴졌다. 삶이란 어쩌면,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 앞에서 조금씩 순응해 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는 이제 먹는 것도, 걷는 것도 스스로 할 수 없었지만, 오히려 그 불편함 속에서 ‘자유’를 느낀다고 했다.

“이제는 선택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하루하루가 그냥 주어지는 대로 흘러가도록 해야 해요. 이상하지 않나요?”

역설적이었다. 자유를 잃은 자리에서 오히려 진정한 자유를 발견한다니. 하지만 나는 이해했다. 인간의 자유란 ‘무엇이든 할 수 있음’이 아니라,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병이 깊어질수록, 말도 어눌하고 단순해졌다.

“저기 나무가 흔들리는 게 예쁘네요.”

계절의 감각은 오로지 마음속에만 있었다. 창문이 보이지 않는 공간은 흰 벽에 갇혀있다. 가을로 접어들었지만, 그의 세계는 늘 봄이다.

삶의 의미를 설명하려던 철학적 언어들이 모두 사라지고, 남은 것은 감각뿐이었다. 그는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는 대신, 하루하루를 살았다.

나는 어느 날 그에게 물었다.

“힘들지 않으세요?”

그는 잠시 미소를 지었다.

“힘들고 때론 무섭죠.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이게 내 일부니까요.”

말 속에는 이별의 기운이 감돌았다.

며칠 후,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얼굴에는 고통 대신 잔잔한 평화가 머물러 있었다.

그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삶의 의미란 결국 무의미를 견디는 힘 속에서 피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엔 “왜 나만”이라 울부짖었지만, 마지막에는 “이제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어요.”라고 했다. 그의 여정은 절망에서 순응으로, 분노에서 포기로, 이어 평화로의 길을 택했다.

삶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해되어 가는 과정이 아닐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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