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호두과자를 먹으며

by 지금은

내가 나고 자란 곳은 ‘호두의 고장’이라 불렸다. 봄이면 산허리에 녹색의 꽃이 피고, 가을이면 단단한 열매가 우수수 떨어졌다. 그 시절의 산골 마을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모두 부지런했고, 그 안에는 언제나 호두의 향이 배어 있었다. 마당 가나 밭 가장자리에도, 돌담 너머에도 호두나무가 있었다. 잎새가 커졌을 때 바람이 불면 살랑이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를 호두가 열매를 맺는 속삭임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였던 나는 호두를 먹기보다 놀잇감으로 더 많이 썼다. 동네 어른들이 함께 모여 장대로 호두를 털어내는 날이면 그중 크기와 모양이 예쁜 것을 골라 팽이로 사용했다. 매끄럽게 균형 잡힌 호두를 돌리면, 바닥에서 빙글빙글 돌며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친구들과 팽이 싸움을 하며 깔깔대던 시간은, 지금 생각해도 참 따뜻하다. 또 가장 작은 두 알을 따로 챙겨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손안에서 굴리면 둥근 감촉이 묘하게 안정감을 주었다. 그 단단함이 마치 내 어린 마음을 지탱해 주는 부적 같았다.

추석이 지난 어느 가을날, 초등학교 옆 공터에 ‘임시 가설극장’이 들어섰다. 사람들은 마을 잔치라도 열린 듯 들떠 있었다. 하얀 천막 안에 영사기가 돌아가고, 스크린에는 흑백의 세상이 펼쳐졌다. 나는 영화가 너무 보고 싶었지만, 입장료를 낼 돈이 없었다. 며칠을 망설이다가 바지 주머니가 터져 나갈 정도로 호두를 가득 채우고 극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보고 싶었니?”

긴장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극장 아저씨는 나를 보며 빙그레 웃더니 호두 몇 알을 손에 쥔 채 극장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그날 처음 본 영화는 먼 나라의 이야기였지만, 내게는 꿈처럼 느껴졌다. 스크린 속 배우의 웃음, 하늘을 나는 비행기, 그리고 바람에 나부끼는 천막의 냄새까지—모두가 눈부셨다. 나는 손에 남은 호두 몇 알을 꼭 쥔 채, 마치 새 세상을 걷는 듯한 기분으로 밤길을 걸었다.

천안의 명물이라 하면 누구나 호두과자를 떠올린다. 하지만 나는 어린 시절 그 호두과자를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다. 깊은 산골에 살았기에, 도시의 간식은 늘 먼 이야기였다. 라디오에서 “천안 호두과자!” 하는 광고가 흘러나오면, 그 이름만으로 고소한 냄새가 나는 듯했지만, 내 입에는 한 번도 닿지 않았다. 그저 호두껍데기를 모아 장작불에 던져 넣을 때 나는 냄새가, 내가 아는 유일한 ‘호두과자의 향기’였다.

세월이 흘러 소년이 된 나는 고향을 떠나 도시로 나왔다. 일과 사람에 치여 바쁘게 살다 보니, 고향의 산천과 호두나무조차 잊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겨울, 고향을 지나는 길에 천안역 앞에서 처음으로 호두과자를 사 먹었다. 종이봉투를 열자 따뜻한 김이 올랐고, 그 안에는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호두를 닮은 과자들이 있었다. 한입 베어 물자, 달콤한 팥이 부드럽게 퍼지고, 고소한 호두가 혀를 스쳤다. 그 순간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 안에는 단지 단맛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시간, 손안에서 굴리던 호두 두 알, 임시 극장에서 보던 영화의 빛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그날 이후로 호두과자는 내게 단순한 과자가 아니었다. 세월의 맛이자, 고향의 기억이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가끔 그 맛이 그리워졌다. 회색 건물들 사이를 걸을 때, 문득 그 달콤한 향이 떠오르면, 마음 한쪽이 따뜻하게 일렁였다.

얼마 전, 내가 사는 집 근처에 새 카페가 생겼다. 커피 향에 이끌려 들어가 보니, 진열대 한쪽에 ‘수제 호두과자’라는 팻말이 눈에 띄었다. 내용물이 달랐다.

‘팥, 고구마, 쌀, 녹두’

나는 망설임 없이 입에 익숙한 팥을 골라 커피와 함께 주문했다. 따뜻한 과자를 반으로 쪼개자, 고소한 냄새가 공기 속으로 퍼졌다. 한입 베어 물자, 문득 오래전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가을의 단풍, 어린 내 손의 감촉, 극장 천막 아래의 웃음소리, 모두가 한입 속에 담겨 있었다. 나는 천천히 씹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세월은 많이 흘렀지만, 그 안에서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바로 그 고소한 향, 그리고 그것이 불러오는 그리움이었다.

호두는 내게 단지 열매가 아니다. 그것은 유년의 상징이며, 나를 키워낸 고향의 숨결이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굴릴 만한 작은 ‘호두 두 알’을 품고 사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때로는 추억이 되고, 때로는 위로가 되어 인생의 고비마다 우리를 지탱해 준다.

지금도 카페의 창가에 앉아 호두과자를 한입 베어 물 때면,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 착각에 빠진다. 산골의 냇물 소리와 할머니를 비롯한 가족의 웃음, 그리고 바람결에 흔들리던 호두나무 잎새가 내 앞에서 살아난다. 그 모든 기억이 향기로 피어오를 때, 나는 깨닫는다. 호두과자는 단순한 과자가 아니라, 고향의 추억 일부분을 되살리는 지구본과 같은 존재라 여겨진다. 크기로 말하면 비록 작은 점에 지나지 않으나 나는 여전히 호두를 만지작거리던 그 아이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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