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민들레 홀씨의 여행

한알

by 지금은

따스한 봄날 아침, 마당 가의 풀잎 위로 햇살이 포근히 내려앉았습니다. 분씨가 피워낸 하얀 향기와 추억이 사라진 자리 옆에 새로이 노란 얼굴을 내민 작은 꽃이 있었지요.

“안녕, 나는 민들레야.”

햇살에 반짝이는 민들레가 수줍게 인사했습니다. 아직 바람이 불면 얼굴을 잎 뒤로 숨기곤 했지만, 그 노란 미소에는 봄의 따스함이 가득 담겨 있었어요.

그때, 고양이가 마당 가에서 하품을 하며 다가왔습니다.

“야옹, 분씨가 자던 자리에 이제 네가 살게 됐구나.”

민들레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분씨요? 그건 누군데요?”

그때 참새 한 마리가 전깃줄 위에서 재잘거리며 내려왔습니다.

“분씨는 밤마다 하얗게 피던 꽃이었어.

달빛 아래에서만 웃던, 참 고운 친구였지.”

민들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그럼, 저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참새는 깃을 털며 대답했습니다.

“글쎄, 너는 낮의 햇살을 품고 있잖아.

밤의 분씨와는 다르지만, 세상엔 각자의 빛이 있는 법이지.”

민들레는 그 말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햇살 속에서 조금씩 몸을 펴고, 노란 얼굴을 활짝 보여주었죠. 그날 오후, 하늘에서 나비 한 마리가 살랑 내려왔습니다. 노란 민들레 꽃잎에 앉아, 달콤한 꿀 냄새를 맡으며 웃었습니다.

“아, 너 참 예쁘다. 봄의 햇살이 그대로 내려앉은 것 같아.”

민들레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습니다.

“고마워요, 나비님. 하지만 저는 아직 세상이 조금 낯설어요.”

“괜찮아. 세상은 넓지만, 다정한 것들도 많단다.”

나비는 부드러운 날개를 펄럭이며 민들레 주위를 돌았습니다.

그때 마당 끝에서 할머니와 아기가 다가왔습니다. 아기가 손가락으로 민들레를 가리키며 웃었습니다.

“할머니, 노란 거예요!”

할머니는 허리를 숙이며 민들레를 바라보았습니다.

“참 예쁘구나. 봄마다 이렇게 피어나서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네.”

민들레는 그 따뜻한 시선에 살짝 몸을 떨었습니다.

“어쩐지 기분이 간질간질해요.”

며칠이 지나고, 민들레의 노란 얼굴은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대신 그 자리엔 하얗고 둥근 솜털이 하나둘 피어났지요. 그건 마치 분씨의 하얀 향기를 닮은 듯했습니다.

“이게 뭐지?” 민들레가 고양이에게 물었습니다.

“그건 네가 다음 세상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 거야. 너의 이야기를 바람에 실어 보내는 거지.”

참새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그래, 이제 네 차례야. 분씨가 밤의 하늘로 향했다면, 너는 낮의 세상으로 날아가는 거야.”

민들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파란 하늘, 구름, 햇살, 그리고 멀리서 다가오는 바람 한 줄기.

그 바람이 속삭였습니다.

“이제 여행할 시간이야.”

민들레는 살짝 떨리는 마음으로 속삭였습니다.

“정말 괜찮을까요?”

바람은 부드럽게 웃었습니다.

“물론이지. 넌 이제 홀씨야. 어디로든 갈 수 있단다.”

그 순간, 민들레의 하얀 머리칼들이 하나둘씩 공중으로 떠올랐습니다. 그들은 놀란 듯 서로 인사했습니다.

“우리 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글쎄, 바람이 아는 길로 가는 거겠지!”

홀씨들은 신이 나서 웃으며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아래에서 아기와 할머니가 손을 흔들었습니다.

“안녕, 민들레야! 또 만나자!”

민들레는 속으로 대답했습니다.

“네, 꼭 다시 돌아올게요.”

홀씨들은 높이높이 날아올랐습니다. 햇살이 반짝이는 들판 위로, 푸른 개울 위로, 그리고 구불구불한 산길 위로 흩날렸습니다.

바람은 노래하듯 말했습니다.

“너희는 이 세상의 이야기꾼이야. 머무는 곳마다 봄의 마음을 전하렴.”

한 홀씨가 개울 위로 떨어졌습니다. 물결이 살짝 그것을 품었습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너를 건너편까지 데려다줄게.”

홀씨는 물 위를 미끄러지듯 흘러갔습니다. 물살이 부드럽게 그를 밀어주며 속삭였습니다.

“세상은 넓고, 다정한 이들이 많단다.”

산을 넘는 홀씨는 잠시 바람을 멈추며 숨을 골랐습니다.

“이렇게 높이 오르다니, 조금 무서워요.”

바람이 말했습니다.

“두려움은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불안함이야. 네 안의 용기를 믿어봐.”

홀씨는 눈을 감고 산 너머로 몸을 맡겼습니다. 그들은 논두렁에도, 학교 앞 화단에도, 할머니의 마당에도 하나둘 내려앉았습니다. 작은 홀씨들이 흙 속으로 사라지며 속삭였습니다.

“내년 봄에 또 만나자. 분씨처럼, 다시 피어나자.”

해질녘, 고양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잣말했습니다.

“야옹, 또 누군가의 이야기가 시작되는구나.”

참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짹짹거리며 대답했습니다.

“맞아요. 세상은 늘 이어지고 있어요. 씨앗이 날아가면, 이야기도 함께 자라니까요.”

어느 또 다른 봄날, 다시 그 마당 가에는 노란 민들레가 피어났습니다. 햇살을 받으며 수줍게 미소 짓는 얼굴, 그 뒤로 고양이와 참새, 그리고 지나가던 아기와 할머니의 웃음소리. 바람이 살짝 속삭였습니다.

“또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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