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감씨 한 알의 교감

한알

by 지금은

옛날 어느 마을의 가을 녘입니다. 저녁이 되자 밥을 짓는 아궁이의 연기가 지붕마다 피어오르고 돌담 사이로 바람이 지나갔습니다. 할머니는 마루 끝에 앉아 붉은 감을 깎고 있었습니다. 호랑이도 좋아한다는 곶감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칼끝이 감 껍질을 따라 원을 그릴 때마다 달콤한 향이 은은하게 묻어났습니다.

“얘야, 이 씨앗을 함부로 버리면 안 된다.”

할머니는 감씨 몇 알을 조심스레 접시에 담으며 말씀하십니다.

“이 안에도 숨 쉬는 생명이 있단다. 언젠가 네 손으로 심어주면, 그게 너와 인연이 될지도 몰라요.”

손자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감씨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작고 미끄러운 씨앗이 반짝이며 노을빛을 머금었습니다.

“이렇게 조그만 게 정말 나무가 될까요?”

할머니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렇지. 작다고 다 약한 건 아니란다. 너도 지금은 어리지만, 마음의 뿌리를 잘 키우면 큰 나무가 될 수 있지.”

그날 이후 손자는 만지작거리던 감씨를 손에서 놓아주기로 했습니다. 그는 마당 끝 언덕에 조그만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몇 알을 넣으며 말했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지만 봄이 오면 만나자.”

시간이 흘러 눈이 녹고 흙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을 때, 감씨가 있던 자리에서 작은 싹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석재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습니다. 바로 옆에서도 또 다른 초록빛 싹이 솟아났습니다.

“어? 감씨는 하나만 심었는데?”

그건 까치가 물어다 놓은 고욤씨였습니다. 두 싹은 같은 햇살 아래, 같은 바람 속에서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감나무 싹은 햇빛을 더 받으려고 위로만 뻗었고, 고욤나무 싹은 옆으로 가지를 펴며 서로의 그늘을 막아주었습니다. 비가 오면 고욤잎이 감잎을 덮어주었고, 가뭄이 들면 감나무의 뿌리가 고욤나무 쪽으로 물기를 나누었습니다.

해가 바뀌고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감나무는 점점 키가 커지며 붉은 기운을 띠었습니다. 몸을 으쓱하며 말했습니다.

“이젠 나 혼자서도 잘 자랄 수 있어.”

고욤나무는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뿌리는 함께니까 괜찮을 거야.”

어느 여름, 큰비가 내렸습니다. 천둥이 산을 울리고 강물이 불어나자, 마을의 나무들이 쓰러졌습니다. 감나무도 바람에 휘청거렸지만, 그의 뿌리는 고욤나무와 단단히 엉켜 있었습니다. 두 나무는 서로의 힘을 빌리며 폭풍을 견뎠습니다.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아지자, 가지마다 둥근 열매가 달렸습니다.

석재는 자라서 청년이 되었고, 마을을 떠나 공부하러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기고 간 두 나무는 여전히 나란히 자랐습니다. 시간이 흘러 누리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두 나무가 하나로 엉켜 거대한 줄기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위는 감나무 줄기가 아래는 고욤나무 기둥이 서로 몸을 맞대고 있습니다. 두 나무는 이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누구의 몸인지 알 수 없습니다. 마을 어른들은 그 나무를 ‘감나무’라 부릅니다. 해마다 가을이면 붉은 감이 가지마다 주렁주렁 열렸고, 그 감은 유난히 달고 부드러웠습니다.

어느 날, 마을의 한 노인이 감을 따며 말했습니다.

“감나무는 혼자선 그리 잘 크지 못하다네. 뿌리가 약해서 고욤 대목에 접붙여야 단단하게 자라지.”

그 옆의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맞아. 고욤의 뿌리에 감나무의 가지를 붙이면, 서로의 약한 걸 채워주지.”

그 말을 듣던 어린아이들이 물었습니다.

“그럼, 감나무는 고욤나무 덕분에 사는 거예요?”

노인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렇기도 하고, 감도 고욤을 살리는 거지. 서로 다르지만, 함께 살아가는 게 세상의 이치란다.”

그날 저녁, 석재는 감나무 아래에 앉아 석양을 바라보았습니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에서 감나무의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그 아래서 고욤나무가 몸을 지탱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속삭입니다.

“나는 나를 키워준 이 나무처럼 살아야겠어. 다른 이와 마음을 나누고, 함께 자라는 나무처럼.”

그 후로도 마을 사람들은 감나무를 심을 때면 먼저 고욤나무를 심고, 그 위에 감나무 가지를 붙입니다. 그건 단순히 농사의 기술이 아니라, 서로의 뿌리를 믿고 의지하는 조상의 지혜입니다. 가을바람이 불면 감잎이 붉게 물들어 떨어졌습니다. 그 잎은 땅에 떨어져 고욤의 뿌리를 덮으며 속삭입니다.

“덕분에 나의 열매가 굵고 달콤해졌어.”

땅속 깊은 곳에서, 고욤의 뿌리가 대답했습니다.

“너의 향기로 내가 단단해졌단다.”

그렇게 감나무와 고욤나무는 서로의 생을 나누며 한세상을 살아갔습니다.

사람들은 그 나무를 보며 말했습니다.

“감의 단맛은 고욤의 뿌리에서 오고, 고욤의 생명은 감의 햇살에서 자란다.”

서로 달라도 함께일 때, 세상은 더욱 따뜻해진다는 걸 옛 어른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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