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운영꽃
어느새 노란 새싹이 연둣빛으로 물들자 얼어붙었던 별들이 생기를 되찾았습니다. 옹기종기 모여 있던 별들이 간격을 넓혀 갑니다. 따스한 바람이 개울을 건너 산 중턱 감자 바위에 부딪히더니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등마루를 넘었습니다. 드디어 뜰 안의 개나리가 몽우리를 터뜨리고 뒷산의 진달래꽃은 시샘과 함께 속살을 드러냈습니다. 벌들이 아이들의 피리 소리를 따라 자운영밭을 찾았습니다.
‘아직은 이르군, 아직은 이른 모양이야.’
바람은 뒷모습을 남겨 둔 채 맴돌다 뒷산 진달래꽃으로 숨어 버리곤 했는데, 이제는 매일같이 찾은 보람이 있어 소년보다도 더 빨리 별들에 소식을 전할 수가 있습니다. 회오리를 일으키며 하늘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야! 드디어 자운영 꽃망울이 하늘을 향했어.”
별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봄눈이 녹을 무렵부터 소년에게 따스한 미소를 보낼 준비를 했습니다.
소년도 별들의 미소를 알아차리고 있었을까요? 피리를 열심히 불며 언덕을 오른 소년은 높은 논둑에서 아래를 향해 미끄러져 내렸습니다.
‘아니, 자운영꽃이 피었네.’
피리 소리를 잠시 놓아둔 소년은 발 앞에서 맞주하는 자운영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별을 헤아리듯 세기 시작했습니다.
‘자운영 하나 나 하나, 자운영 둘, 나…….’
더 이상 셀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셀 수가 없습니다. 따스한 별의 미소가 막 시작되었기 때문이겠지요. 소년은 아무래도 소녀를 데리고 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소녀의 미소가 별빛보다 더 따스할지 모른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버들피리 소리를 자운영꽃 옆에 살그머니 놓고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소녀가 빨리 다가온다면 자운영꽃들은 앞을 다투어 고개를 들 테니까요.
소년은 주먹에 힘을 주었습니다. 이를 알아차린 바람이‘휘’하고 앞서갑니다. 꽃 주위를 맴돌던 나비를 앞세우고 달려갑니다. 배추꽃보다도 더 하얀 나비입니다. 무꽃보다도 더 향기 짙은 나비입니다. 소년은 나비보다 한발 앞서고 싶었습니다. 논둑을 따라 달리다 징검다리를 건넜습니다. 나비는 논둑을 가로질러 갑니다. 저만치 앞서 날아갑니다. 바람이 꼬리 달린 풍선을 허공에 그려놓고 재빨리 달아납니다. 징검다리를 뛰어넘어 달렸습니다. 바람은 소년이 앞서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나 봅니다.
그러나 소년은 바람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나비도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소녀의 맑고 고운 눈동자만을 마음속에 담았습니다. 보드라운 미소만을 생각하기로 하였습니다. 섶다리를 건너 언덕을 가로지르는 통나무 다리를 건넜습니다. 숨이 찹니다. 둥구나무 옆을 지나칠 때는 벌써 해거름이 시작되었습니다. 숨 가쁜 소년의 앞으로 그림자가 길게 다가섰습니다.
터질 듯한 가슴을 안고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급한 일이 생겼니?”
소녀가 물었지만,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침을 몇 번 했지만, 숨이 차올라 휘파람 소리와 함께 숨을 토해 냈습니다.
“왜 그래?”
“······.”
“무슨 일인데.”
“·······.”
소년은 그만 눈물이 찔끔 나왔습니다.
“왜 그래?”
“······.”
소년은 소녀의 맑은 눈을 더 이상 바라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려 집으로 달렸습니다.
“참 이상한 애야?”
집으로 돌아온 소년은 두근거리는 마음과 속눈썹 아래로 넘쳐흐를지 모를 눈물을 보이기가 싫어 골방으로 숨어들었습니다.
“형아, 왜 그래?”
댓돌 위에서 동그마니 앞을 바라보던 동생이 어느새 쪼르르 쫓아와 손을 잡았습니다.
“응,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
“응, 별을 세고 싶어서 그래.”
“나도 그래, 아까부터 하늘을 보고, 별세는 연습했다니까.”
오늘밤 별빛은 더욱 고왔습니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저 별은 내 별, 저 별은 네 별.”
“형아, 저 별은 누구인데?”
“아직은.”
“나도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