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운영꽃
학교 수업이 끝나자, 소년은 자운영 논으로 달렸습니다. 길가의 논둑 밑으로 미끄러져 내렸습니다. 잔디밭보다도 더 곱게 초록빛으로 물들었고 어느새 꽃봉오리가 수많은 붉은 점을 찍었습니다. 소년은 작년 재작년 그리고 재재작년에도 그랬던 것처럼 꽃시계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누구에게 줄 것도 아니면서 계속 만들었을 때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올해는 그 누구에게 꼭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꽃이 너무 고와서 꽃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향긋한 냄새가 살그머니 코밑을 스칩니다. 소년은 기분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벌들이 다가와 꽃 주위를 맴돕니다. 소년은 벌을 쫓아내기가 싫습니다. 나비가 다가왔지만 역시 쫓아내기가 싫습니다. 꽃은 소년보다 벌 나비를 더 사랑하겠지요. 소년은 다만 이들이 알아서 물러나 주기를 바랐습니다.
턱을 고이고 꽃 가까이 엎드렸습니다. 곧 물러날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들이 잠시 후 물러갔지만, 다른 벌들이 다시 다가왔습니다. 소년은 먼저 벌들이 떠났던 것처럼 일어나 몇 발짝 떨어진 꽃으로 자리를 옮겨 조심스럽게 엎드렸습니다.
반쯤 잎을 열기 시작한 꽃입니다. 소년은 이 꽃이 더 예뻤습니다. 아직 벌이 다가오지는 않았어도 나비가 다가오지는 않았어도 소녀처럼 맑고 맑은 꽃망울입니다. 꽃 가까이 턱을 고이고 머리를 숙여 더 가까이했습니다. 눈을 감았습니다. 눈을 감아야 더 아름답게 보일 것만 같습니다. 그러자 꽃 속에서 소녀의 해맑고 고운 얼굴이 다가왔습니다. 소년은 기뻤습니다. 미소 짓는 얼굴이 예뻤습니다. 이마에 난 솜털과 눈썹이 예뻤습니다.
“너 혼자 뭐 하니?”
소년은 눈을 뜨기가 싫었습니다.
“뭐 하니? 참 이상한 애야.”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더니 소녀는 어느새 살그머니 다가와 쪼그리고 앉아 있습니다.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눈이 마주쳤습니다.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소년은 자운영밭에 연두색 발자국을 남기며 논둑을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의 얼굴이 갑자기 달아오르고 가슴이 뛰었습니다. 아까부터 모습을 훔쳐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둥구나무 가까이 왔을 때는 숨이 차서 더 이상 뛸 수가 없었습니다. 멈춰 섰을 때는 눈앞에 별들이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보다 더 노랗고 더 반짝이는 별입니다. 숨을 헐떡이며 둥구나무 뒤에 숨어서 저 아래 개울 건너 자운영 논을 바라보았습니다. 아직도 소녀는 그대로 거기 있습니다. 내가 했던 것처럼, 무릎을 꿇고 엎드려 양손으로 턱을 고인 채 자운영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