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운영꽃
이런 일이 있고부터는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소년은 자운영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다가가려고 했지만, 그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차올랐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을 동미고개로 바꾸었습니다. 힘들게 올라가는 길입니다. 가팔라서 우리 동네 사람들이 어쩌다 이용하고 안골 사람들만이 다니는 길입니다. 그렇지만 동미고개에 올라서면 자운영밭은 물론 우리 동네도 한눈에 들어옵니다. 개울을 옆에 끼고 징검다리도 쉽게 건널 수 있습니다.
양지말 뒷산을 비롯해 안골 산들이 진달래꽃으로 빨갛게 물들었습니다. 개나리도 집마다 담장을 덮었습니다. 선생님은 언젠가 도화지 위에 나타난 그림을 보고 너무 단조롭다며 몇 가지 색을 더 사용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씀하신 때가 있습니다. 지금 그 모습을 다시 그린다면 단정하게 세 가지만 칠하고 싶습니다.
소년은 자기도 모르게 꽃동산에 몸을 감추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진달래 속에 묻혀있으면서도 저 아래 자운영이 더 마음에 와닿기 때문입니다. 전까지만 해도 연둣빛으로 물들던 자운영이 며칠이 지난 지금은 초록빛 잎들을 가린 채 붉은 꽃들로 큰 논밭을 덮어버렸습니다.
소년은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며 소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왠지 곧 와 줄 것만 같은 예감이 듭니다. 길 아래로 내려가 바위 옆, 진달래꽃 더미 속에 몸을 숨겼습니다. 혹시라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소녀를 기다리는 속마음이 발각될지도 모릅니다. 바위 사이에 쪼그려 앉아 무릎을 안았습니다. 따스한 햇볕이 두 팔 위를 지나 가슴으로 파고듭니다. 목덜미가 따스해집니다. 갑자기 졸음이 몰려옵니다. 두 눈을 살며시 감았습니다. 소녀의 예쁜 얼굴이 다가옵니다. 자운영꽃 속에서 머리를 내밀었습니다. 큰 나무 위를 지나가는 헬리콥터가 요란스럽게 소리를 냈지만 눈을 뜨기가 싫었습니다. 소녀의 얼굴을 잊어버릴까 봐 싫었습니다. 자운영과 함께 잊어버릴까 봐 싫었습니다. 햇살이 머리 위로 활짝 펴지자, 소년은 소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소녀가 저 아래서 진달래꽃 속에 숨어 있는 소년을 발견하고 환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꽃목걸이를 손에 들고 살랑살랑 봄바람처럼 흔들댔습니다. 소년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소년은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야아아.”
그러자 소녀는 논둑을 넘어 산비탈을 힘겹게 올라옵니다. 소년은 일어섰습니다. 소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내민 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발아래 바위가 미끄러워 소녀의 발이 자꾸만 미끄러져 내립니다. 소년은 아래로 팔을 더 길게 뻗었습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두 손이 서로 잡힐 듯 잡힐 듯, 두 손이 맞닿으려는 순간 소녀는 저 아래로 곤두박질을 치고 말았습니다.
“안 돼.”
소년은 깜짝 놀라 소리를 쳤습니다. 이마에는 어느새 땀방울이 맺혔습니다. 옷소매가 저절로 이마로 다가갔습니다. 이마의 땀을 닦으며 아래를 내려다 봤지만, 소녀는 끝내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년은 소녀가 갑자기 걱정되었습니다. 바위에서 주르르 미끄러졌습니다. 현기증이 납니다. 갑자기 노란 별이 이마에 붙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