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00월 00일

자운영꽃

by 지금은

다음날도 집으로 돌아올 때 동미고개로 향했습니다. 조금 있으면 꽃들이 지려는지 더욱 붉게 물들어 갑니다.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어제처럼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년은 설렘 반 기대 반으로 아래를 향해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안 오겠지 뭐. 아니야, 왔다 갔겠지.’

소년은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자운영꽃이 모두 시들기 전에 꽃시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작년에 했던 것처럼, 재작년에 만들었던 것보다 더 빨리 더 예쁘게 만들어야 합니다. 미끄러지고 자빠지며 잡목들 사이를 달렸습니다.

소년은 무릎을 꿇었습니다. 일찍 피어난 꽃은 군데군데 시들고 생기를 잃었습니다. 그 꽃 사이로 작은 씨앗을 담은 검은 꼬투리의 줄기가 하늘을 향합니다. 벌과 나비들이 한층 많아졌습니다. 새로 피어나는 싱싱한 꽃을 따기 위해 자운영잎을 조심스레 헤쳤습니다. 하나를 따서 줄기를 손가락 사이에 끼웠습니다. 또 하나를 따서 손톱 끝으로 줄기를 갈랐습니다. 소녀의 까만 눈동자가 떠오릅니다.

“얘, 뭐하니?”

고개를 들자, 소녀는 언제 다가왔는지 한 손에 자운영꽃을 한 움큼 가지런히 모아 쥔 채 서 있었습니다. 소년은 말없이 찢긴 줄기 사이로 꽃의 줄기를 끼워 넣어 시계를 만들었습니다.

“그게 뭐니?”

“꽃시계.”

“바보. 꽃반지지.”

“······.”

소년은 갑자기 얼굴이 달아올랐습니다.

소녀도 소년의 옆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누구 줄 건데?”

“······.”

“예쁘게 잘 만들었다.”

소년은 외면한 채 소녀에게 꽃시계를 내밀었습니다.

“나 주려고?”

소녀는 손가락을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조심스럽게 옷소매를 올리고 손목에 매어 주었습니다.

“정말, 아주 멋진 시계네.”

소년은 씨익 웃으며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소녀도 해맑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분홍색 입술에 번지는 미소가 더욱 예뻐 보였습니다. 소년은 소녀의 손에 들려 있는 꽃으로 반지를 만들었습니다.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매어 주었습니다. 소녀의 손가락은 온통 꽃반지로 물들었습니다.

“참 예쁘다. 시들지 말고, 오래오래 있으면 좋겠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눈과 파리한 입술에는 아까보다 해맑은 웃음이 번지고 있었습니다.

“너 어느 학년이니?”

“오학년.”

“너는?”

“······.”

“어느 학년?”

“학교에 안 다녀.”

“그럼?”

“우리 엄마가 매일 가르쳐 준다. 우리 엄마하고 둘 이만 살아.”

“······.”

“너, 나 잡아 볼래?”

소녀는 풀밭 위로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년은 마침내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소녀가 달아나는 발밑의 자운영꽃은 소녀의 치마처럼 나풀거리며 발자국보다 앞서 줄지어 누워 버렸습니다. 소녀를 곧 잡을 수가 있었지만, 소년은 잡을 듯 잡을 듯 잡지 않았습니다. 달아나는 뒷모습이 예뻤습니다. 소년의 손가락이 자꾸만 소녀의 등을 스칠듯 말 듯합니다. 소녀는 잡히지 않으려고 치마폭을 날리며 달아났습니다. 블라우스 깃을 날리며 달아납니다. 소년이 손을 잡았을 때는 더 이상 소녀는 달아날 수가 없었습니다. 기침이 나고 숨이 찹니다. 드디어 소녀는 자운영밭에 꽃잎처럼 쓰러져 눕고 말았습니다. 입술이 파랗게 물들었습니다. 소년도 쓰러질 듯 누워 버렸습니다. 하늘은 눈앞에 있던 망사처럼 얇은 구름을 지워 버렸습니다.

“아 시원하다.”

소년은 머리를 들어 옆에 있는 소녀의 얼굴로 가까이 가져갔습니다. 이마와 콧잔등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습니다. 숨을 몰아쉬던 소녀의 몸이 바르르 떨렸습니다.

“왜 그래, 춥니?”

소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입술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소녀는 힘없이 손을 가로저었습니다. 이마에는 맺혔던 땀방울이 귓바퀴를 향해 쪼르르 흘러내리고 얼굴에 핏기가 가시었습니다.

“어디 아프니?”

다시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소년은 벌떡 일어나 앉았습니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쳐다보았습니다.

“괜찮아, 숨이 좀 차서 그래. 조금만 있으면 돼.”

소녀는 꽃반지 가득 찬 손으로 소년의 양 볼을 감싸며 말했습니다. 소녀의 양손이 차갑기는 해도 아주 보드라운 감촉으로 얼굴을 간질였습니다. 눈을 감고 가슴을 벌떡이며 숨을 고르던 소녀는 ‘휴’ 하고 길게 숨을 토해 내고는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소년을 향해 코가 얼굴에 닿을 듯 말 듯 가까이하고 말했습니다.

“그만 가자. 이따가 우리 집에 와 줄 수 있겠니?”

“······.”

“좋은 거 보여 줄 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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