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특별한 걸음 20210829
나는 언제인가부터 무작정 걷는 날이 많습니다. 목적지를 정하고 집을 나설 때도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발이 닿는 대로 마음이 따라갑니다. 오늘도 현관문을 열었지만 딱히 어디라고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여기저기 한눈을 파는 사이 발걸음은 신호등 앞에서 멈췄습니다. 오후의 햇살이 아직은 따갑습니다. 모자를 쓰기는 했지만, 챙이 짧으니 강한 햇빛이 정면으로 부딪치자, 눈을 반쯤 감은 상태입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가 했는데 내 몸은 큰 건물 옆의 광장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나는 지금 걷고 있습니다. 광장 바닥, 띠를 두른 보도블록 위를 길인 양 따라갑니다. 저 끝에서 돌아서서 다음 칸을 밟을 것입니다. 전에도 그렇게 광장바닥을 몇 차례 왕복했던 적이 있습니다. 색깔이 다른 보도블록 위를 다음 칸 다음 칸 하고 걷다 보면 한두 시간이 흘러갑니다.
나는 빈 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렇게 눈 쌓인 겨울부터 봄을 지나고 여름까지 자주 걸었습니다. 혼자입니다. 공원이나 산길 또는 동네 골목을 걷는 것에 비해 지루합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이런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운동이니까 참고 걷는 거지.’
지루함을 이겨보려고 애써 마음을 다스립니다. 변화가 없는 길을 혼자 걷는 것은 유쾌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갔던 길을 되돌아오고 또 가고 되돌아오는 것은 때에 따라서는 짜증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초등학교 때입니다. 운동회의 시기가 돌아오면 한두 달 전부터 연습했습니다. 지금도 잊히지 않은 것은 매스게임입니다. 사 학년 때부터 육 학년 때까지 삼 개 학년이 운동장을 걸었습니다. 일렬로 행진하면서 정해진 모양을 만듭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후 수업이 시작되면 운동장에 모여 같은 행동을 반복했습니다. 앞 친구의 머리를 보면서 몇십 분을 걸었습니다. 선생님들의 마음이 흡족하지 않을 때는 두 시간 정도를 행진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학생들은 그 시간 틈틈이 지적받으며 멈추고 걷기를 반복했습니다.
나는 이 일로 운동회가 다가오면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달리기까지 잘 못하니 운동회 자체가 없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자유로운 걷기도 아니고 규칙에 얽매인 경직된 행동은 마음을 쓸쓸하게 만들었습니다.
초등학생 이후 제식훈련도 지루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군에서의 제식훈련이나 구보도 똑같습니다. 다만 군에서는 국방의 의무를 다한다는 뜻에서 생각이 조금 달랐습니다. 대대 또는 소대별로 무리를 지어 움직입니다. 경쟁심이 생기고 전우애라는 것도 마음속에 있으니 함께 한다는 마음에 지루함이 덜했습니다.
하루는 부대별 대항 행군을 하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완전군장을 하고 걷는데 이 날따라 몸의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목적지 가까이 갔을 때 나의 몸이 휘청거리기 시작합니다. 진땀이 나면서 어지럼증이 생겼습니다. 몸이 뒤처지기 시작하자 주위 동료들이 낌새를 알아차렸습니다. 덩치 큰 친구가 소총을 빼앗아 들었습니다. 힘을 내어 대열에 맞추어 몸을 움직였지만, 무거운 배낭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자꾸만 몸이 앞으로 숙어집니다. 철모가 벗겨질 것만 같습니다. 한 동료가 내 배낭을 벗겨 자신의 목덜미에 올립니다. 배낭 위에 배낭이 올라선 셈입니다. 낙오자가 있으면 인원수에 따라 점수가 감점되니 동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함께 부대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등수에 따라 그날의 대우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빨리 가고 싶으면 혼자 가고, 멀리 가고 싶으면 여럿이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걷는 중입니다. 빨리 간다는 마음은 없습니다. 멀리 간다는 마음도 없습니다. 그저 걷는 겁니다. 나는 혼자 걷다 보면 자신을 잊는 경우가 있습니다. 걷고 있다는 자체도 잊습니다. 광장을 가장자리부터 보도블록을 하나하나 밟으며 몇 차례나 왕복을 거듭하지만, 오늘은 나 자신이 잊히지 않습니다. 자꾸만 잡념이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순간입니다. 갑자기 친구를 떠올립니다. 고등학생 때입니다. 친척 아저씨의 부탁으로 양수리의 어느 시골집에 심부를 간 일이 있습니다. 혼자 갔다 오려니 심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친구에게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나들이를 좋아하는 그는 흔쾌히 나의 말에 따라주었습니다. 역에서 내려 차가 다니지 않는 강가를 따라 걸었습니다. 먼 거리였기에 집에 돌아왔을 때는 어느새 어둠이 깃들었습니다.
나는 그 친구를 마음속으로 불러와 광장을 걷는 중입니다. 그때도 함께 걸어서인지 먼 거리임에도 지루한 줄을 몰랐습니다. 도란도란 말을 주고받으며 걸어갑니다. 강 주위의 경치를 구경하며 기슭을 걷고 있습니다. 걷다 보면 종종 검붉은 산딸기가 보였습니다. 잘 익어가고 있습니다. 입이 답니다. 햇살을 받은 강물이 반짝입니다.
삶이란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여럿이 있어도 외로운 사람,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함께 가야 하는 것은 사람뿐인가요. 이 세상에는 함께 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풍경이 있고, 책이 있고, 음악이 있고, 미술도 있습니다. 모든 일들은 생각에서 시작됩니다.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나 자신을 잊을 수가 없다면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 마음속으로 데려와 함께 하면 되지 않을까요.
오늘은 친구와 광장을 걷다 보니 어느새 만 보를 넘겼습니다. 오래전 그 친구 지금은 잘 있는지.
나는 혼자 걷기를 좋아합니다. 멀리 가기는 틀렸는가 봅니다.
‘아닙니다.’ 내 걸음은 특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