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나무 May 16. 2024

오후를 걷다

버스 밖 거리가 희뿌옇다

건물의 외벽이 눈을 비비고

가로수들이 눈을 비비고

담장 아래 핀 꽃들의 비빈 눈에도

거리는 시무룩했다


전염이라도 된 듯 하품이 증상처럼 퍼지자

버스는 바쁘게 승객을 토해내고 달아난다

씨앗을 품지 못해 내쳐진 꽃잎 같은 거리

겨울은 너무 먼 시간에 있는데

집을 나선 이유가 신호등처럼 깜빡거렸다


누구라도 세워

혹시, 저 모르시겠어요?

묻고 싶은 목마름이 올라왔다

영자든, 미자든 발길에 치이는 이름이라도

밟히고 싶은,


시무룩한 오후의 거리에선

상가 앞, 바람풍선의 호객 행위도 기꺼워진다

커피 한 잔이 내어준 자리에 뼈 마디 몇 개 얹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기다림을 끝낸 사람들의 표정을 훔쳤다


숨겨 둘레야 숨길 수 없는 여우 짓에

아직 제 본성을 드러내지 못한 어린 늑대 몇 마리 보였다

바람 빠진 바퀴로 삐거덕 거리던 노인이 걸터앉았고

환갑을 넘은 동창생들의 호들갑이 귓불을 붉힌다


아, 그 많던 비둘기들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나는 희뿌연 거리를 쪼고 있는 것일까? 외마디 비명도 없이 원점으로 돌아간 비둘기

겨울을 품은 씨앗이 되었을까?

작가의 이전글 사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