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엉등의 계절
밭일을 위해 오갈 때면, 간선도로 대신 가급적 해안 길을 택한다. 남해 바다는 호수처럼 유순하고, 외가 동네를 스칠 수 있어 자꾸만 그 길로 향하게 된다.
‘잉어가 노니는 모습’과 닮았다 하여 마을 이름을 ‘이어’라 불렀다. 집들이 모여 있는 등허리 부분은 ‘여엉등’이라 한다. 낯설지만 정겨운, 소리만으로도 기억을 흔드는 이름이다.
간선도로가 마을의 어귀라면, 해안 도로는 그 끝자락이다. 주민 대부분은 농어업에 종사하고, 이 길은 곧 생업의 터전이다. 그중에서도 자주 눈길이 머무는 곳이 있다. 해풍을 막으며 묵묵히 서 있는 감송포 언덕배기의 소나무들이다. 오늘도 잠시 차를 세워 바라본다.
오래된 풍경 하나가 떠오른다.
까무잡잡한 예닐곱 살 꼬마와 이십 대 한 청년이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송포 아래 펼쳐진 넓은 들, ‘감앞’이라 불리는 그곳엔 벼 이삭들이 바람 따라 출렁이며 황금빛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 논두렁을 사뿐사뿐 헤쳐 나오던 삼십 대 초반의 여자분. 나풀거리는 치마저고리 옷자락과 함께 가까워졌고, 그녀는 맡겨둔 둘째 아이가 잘 자랐을까, 친정 식구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가슴이 얼마나 뛰었을까...
그 속마음을 알 리 없던 꼬마는 막내 외삼촌만 남겨둔 채 외갓집으로 도망치듯 달렸다. 주체할 수 없이 요동치는 가슴, 달아오른 얼굴. 그날 만남은 왠지 모르게 낯설고 민망했다.
한동안 외가에서 머무르던 시절, 나는 할머니의 품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여엉등 밭에서 고구마 캘 때도, 바닷가에서 바지락과 쏙을 잡을 때도, 할머니를 실과 바늘처럼 따라다녔다. 한밤중 용변이 급해 깨워도 마다하지 않으셨고, 싸리문 옆 화장실 앞에서 하품하시며 기다리셨다.
조손은 함께 밥상에 앉았다. 할아버지가 건네주거나 일부러 남겨둔 고기, 생선 덕에 밥투정은 해본 적이 없었다. 밥을 뜨는 외손자를 그저 빙긋이 내려다보던 그분의 속마음, 그땐 몰랐다. ‘얼래!’하며 낮은 꾸중을 들을 때면, 황소고집 부리는 나를 어르고 달래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
우는 입에 등겨 집어넣기, 잉크를 껌이라며 씹게 하기, 빈 공기총을 종아리에 쏘기. 이 모두가 막내 외삼촌의 짓궂은 장난이었다. 그런가 하면 멀찌감치 바라보던 외숙모, 다소 엄한 큰외삼촌까지 모두가 나의 소중한 식구였다.
외갓집 생활을 거슬러 올라가면 엄마와의 가슴 아픈 이별이 있었다. 부모님이 소도시에서 세 형제를 데리고 어렵게 살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두 살 아래 동생을 업은 엄마가 선착장까지 나왔다. 나와 함께 배에 오를 줄 알았지만, 어른들은 다 계획이 있었다. 뒤늦게 떼를 부린다고 상황이 달라지지 않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 후 엄마의 얼굴을 까맣게 잊고 지낼 만큼, 마음이 멀어졌다. 그래서 나는 다가오는 엄마가 낯설고 얄미웠는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보살핌은 친부모의 빈자리를 채우고도 남았다. 음수사원(飮水思源)이라 했던가. 엄마보다 더 근원적이고 농밀한 정을 온몸으로 받았으니 내게는 과분할 정도의 사랑이었다.
받은 만큼 흘려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 아직도 꼼작 않고 있는 딸은 오늘만큼은 귀가 간질거릴 것이다.